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마련한 뒤에 한다(繪事後素)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마련한 뒤에 한다(繪事後素)
  • 승인 2017.05.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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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전 중리초등학교 교장
며칠 전 대구조야초등학교에 학부모역량개발강의를 갔다. 전교생이 60여명이어서 세대수가 그리 많지 않아 학부모들이 네댓 명 오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열 명이 넘게 왔다. 깜짝 놀랐다. 백분율로 따지면 30%이상이 참석한 숫자이다. 무조건 질문을 많이 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강의를 시작하였다. 제일 뒤쪽에 앉은 엄마가 졸음을 이기고 못하고 눈을 감고 잠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더니 일어나서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강의를 들었다.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움직여가며 인성강의를 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가방을 챙기는데 잠을 이기지 못한 학모가 곁으로 다가오더니 “강사님 죄송해요. 어젯밤에 집안 일이 너무 많아서 밤을 꼬박 새웠어요. 강의 제대로 듣지 못해서 죄송해요.”하였다. 숙였던 고개를 드는데 학모의 아름다운 눈에서는 눈물이 배어 있었다. 가슴이 뭉클하고 찌릿하였다. ‘강사에게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코끝이 찡하였다.

방문증을 반납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또 다른 학모가 한 사람 기다렸다가 “강사님 질문을 많이 하라고 하셨는데 강의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하고 예쁜 보조개웃음을 지었다.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많은 강의를 다녔지만 이렇게 감동적이고 흐뭇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자하가 공자께 “‘예쁘게 웃을 때 드러나는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의 흑백이 선명함이여, 흰색으로 색칠을 하네.’라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하고 여쭈었다.

공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니라”하고 대답하였다. 회사(繪事)는 그림 그리는 일이다. 후소(後素)는 흰 바탕보다 나중이라는 말이다. 회사후소(繪事後素)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마련한 뒤에 한다.’는 뜻이다.

오직 단맛이어야 다섯 가지 맛을 혀끝에 느낄 수 있고, 유독 흰색이어야 다섯 가지 색을 바탕에 칠할 수 있다. 사람도 당연히 아름다운 자질을 갖춘 뒤에야 겉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순서에 관한 논리이다.

자하가 “예(禮)는 인(仁) 뒤에 오는 것입니까?”하고 여쭈었다. “나를 일깨우는 자는 자하로다.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하였다. 순서를 굳이 따진다면 어짊이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마음씨 다음에 여러 가지 꾸밈인 수식이 필요한 것이다.

조야초등학교의 학부모들은 예쁜 웃음을 웃을 줄 알았다. 또한 작은 미안함에도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짊을 실천하는 생활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인 듯하다.

논어에 공자와 더불어 시를 이야기한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자하는 스승인 공자와 시를 논하다가 학문을 알게 된 경우이다. 반대로 자공은 학문을 논하다가 시를 알게 된 경우이다. 제자의 능력에 따라 교육법은 달랐다.

자공이 공자에게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하고 여쭈었다. 공자는 “괜찮겠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자이면서도 예의를 좋아하는 것이 더 낫다.”고 대답하였다.

“시경에 ‘자르고, 갈고, 쪼고, 다듬는다.’는 절차탁마(切磋琢磨)와 같은 말이군요.”하고 자공은 말하였다. 공자는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하고 기뻐하였다.

넉넉하지 않으면서 아첨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즐거워하는 조야초등학교의 학부모들이야 말로 진정한 사람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저 존경스럽다.

변영은 교장선생님은 교육대학을 수석 졸업한 수재란다. 그런데도 남에게 교만하지 않고 거만함을 보이지 않는단다. 교육의 해박한 이론과 실제와의 괴리를 조화시켜 학교경영에 절차탁마해 나간단다. 아마 학부모를 위한 교육도 자르고, 갈고, 쪼고, 다듬어 나가는 것임일레라.

인성강의는 고리타분하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인기가 없다. 그러나 인성교육진흥법에는 실천덕목 여덟 개가 있다. 그 첫째가 예(禮)이다. 예의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의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의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의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세목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꼭 필요하다. 무릇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마련한 뒤에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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