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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기고

<데스크칼럼> 박재봉, 대구

기사전송 2017-11-07, 21: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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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 (사회부장)



1979년 대구의 원두커피전문점 시대를 연 ‘늘봄’, 반월당 화방골목의 풀하우스와 삼덕소방서 건너 올드블루, 변상일씨의 카페갤러리 F&P(FASHION&PASSION-앞산 카페거리, 2003년 ‘남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점포’에 선정, 현재 DINING YOU(다이닝유)- 한마음선원 대구지원, 수성못 뉴욕뉴욕, 교수촌의 전통찻집 다천산방, 범어공원 스테이크 하우스 아트리움, 26년 전 대구 최초의 노출콘크리트 건축 전상진 패션, 경산 와촌 갓바위농원의 선빌리지, 실내인테리어 업자의 벤치마킹 1순위 공간인 나무@906. 파크호텔(현 호텔 인터불고)까지 모두 박재봉 선생의 작품이다.

건축가라기보다는 건축디자이너라고 불리길 바라는 그는 대구·경북에서 활동하며 1984년 제1회 한국인테리어디자이너협회(KOSID) 작품상을 수상했다. 대구를 무대로 활동하며 건축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모든 기준이 방송매체에 노출되는 평판시계에 맞춰 혼돈스럽게 돌아가는 이즈음 애잔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업건축의 세계에 종사하면서도 순수한 영혼을 발휘했던 건축 디자이너 박재봉 선생이 뇌경색 질환으로 대구 어느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일면식 없었지만 선생이 입원해 있는 남산동의 한 병원을 찾았다. 어느 시기 “동성로에서 박재봉 소장을 만나려면 3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풍문이 파다했던 선생을 찾아뵙고 쾌유를 비는 것은 세상만사 정보를 다루는 기자의 도리라는 소신에서였다.

대구가 능금빛으로 빛났던 지난 전성기를 간직한 그가 늙고 병들어 아파하는 것을 보며 대구를 생각해 본다. 1939년생인 선생은 경북고와 서라벌예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하양에서 미술교사로 일하다 사표를 쓰고 동성로로 걸어나왔다. 선생은 개념도 없던 실내건축 인테리어 일을 시작한 뒤 핸디환경디자인연구소(Human ENvironment Design Institute)를 세우고 그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한국 인테리어 건축의 역사를 쓴다. 70년대 당시에 환경운동가도 아니면서 건축과 예술이 결합된 인테리어에 ‘환경’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인 것은 혁명적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 공해추방운동, 90년대 페놀사태 이후 등장한 환경운동 이전에 건축에 환경디자인 개념을 도입한 선구자적 건축디자이너였다. 서울업체의 스카웃제의에도 그는 대구를 지켰다.

“위대한 자연에 잠시 잠깐 어울리는 물건을 놓는다”라는 자세로 일했다는 ‘물·바람·돌’의 재일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庾東龍))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교유하게 되었으며 의형제가 된다. 이타미 준의 권유로 박재봉의 사진전이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열리기도 했다. 이런 인적 연유로 박재봉 건축 디자인의 키워드는 ‘환경’에서 ‘자연’으로 순환회귀했다.

대구 문화가의 뒷골목에선 “대구 문화예술의 전성기는 60년대 중반기부터 70년대 중반 10년 세월 절정에 달아올라, 80년대를 풍미하며, 90년대 박재봉의 은퇴 시기였던 IMF와 함께 무너졌다”는 말이 있다. 당시 부산광주는 안중에도 없고 서울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았던 그 자부의 세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지금은 있는지 궁금하다.

대구가 자랑하는 현대미술의 메카론도 따지고 보면 1974년 강정에서 몇 명의 청년 미술가들이 낙동강 백사장을 배경으로 미술적 상상놀이를 한데서 비롯되었다. 선생은 거기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대구현대미술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다. 그 주요한 멤버들이 선생의 지인지기들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초 대구에서 아방가르드적인 문화예술운동을 했던 기타리스트 이성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박재봉을 ‘대구 건축계의 김수근 같은 존재’로 기억한다.

60대에 들어선 박재봉은 산청 민들레공동체 마을을 비롯해 지리산 일대의 공동체에 사람이 다시 찾는 생태건축을 만들기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부했다. 그 말 없는 따뜻한 삶의 실천이 울림이 되어 메아리치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 사람들은 사회적 공론장으로 소환될 수밖에 없고, 그 아름다웠던 추억의 순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화세상에 가깝다는 증표일 게다. 도시 번화가의 사업가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었던 그의 돈주머니가 그리 두둑하지 않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어떤 현장을 맡으면 장인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던 가버린 시절을 되짚어보게 된다.

인생지사 생노병사의 쳇바퀴 속이지만, 선생의 건강한 노후와 여생이 대구와 함께 동행하기를 빌어본다.

대구시에 각 분야에서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한 원로 공신록이 있는 지 묻고 싶다. 시청 출입을 하지만 나는 틈틈이 오늘도 내일도 앞무대에서 듣지 못한 미담잡담이 풍성한 뒷골목으로 향한다. 권영진 시장이 박재봉 선생을 찾아가는 그런 광경은 대구에서 보기 어려운 것인지 가을 바람에 마음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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