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 찾다
더듬어 찾다
  • 승인 2016.11.2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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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희 시인

1.

전생에 한 번 봤음직한 낡은 기와집의 빗장이 어설프게 걸쳐져 있다 대문은 한 번도 제대로 잠긴 적도 활짝 열린 적도 없었다 녹슨 우편함에 꽂힌 빛바랜 청구서만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대문의 비린 냄새 사이로 들숨을 감춘 채 집안을 살피고 있다

2.

어머니 방에는 재봉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섣달그믐밤에 어머니와 부라더미싱은 야무진 어머니의 손끝에서 한바탕 호된 정사를 치르곤 했다 큰언니의 고사리 같은 손에 길들어진 미제다리미는 화려한 꽃무늬 치마폭에 윤기 나는 길을 내어 주었다 뜯어진 실밥들은 끈질기게 어머니의 품속까지 점령하고 틈새를 공격하는 외풍은 평생 콧물 마르지 않던 어머니의 콧등과 큰언니의 졸음 섞인 눈두덩에 훅하니 달라붙었다

3.

마당을 지나 마루에는 색 바랜 흑백사진들이 화석처럼 굳어져 있다 사진속의 존재들이 걸어간 온기 없는 마당의 균열을 타고 검은 곰팡이들 이승의 발자국을 더듬고 있다

4.

도심의 사각지대에서 헤매는 발자국을 더듬어 찾고 있다

◇정은희=1962년 대구 출생
‘난설독서회’ 회장 역임

<해설> 유년의 기억들이 웅크린 고향집은 온통 향수(鄕愁)로 물결치고 있다. 무심히 흘러가는 지난날들을 젊음으로 차곡차곡 눌러온 나잇살엔 그리움의 물결만 서풍을 따라 출렁인다. 사색의 창, 그 곁을 서성이는 도시인의 가슴엔 늘 돌아가고픈 유년의 그리움만이 파수(把守) 돌고 있을 뿐이다. -정광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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