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능에서 출토된 연밥이/ 천년 세월 건너뛰어 싹을 틔웠다 해서/ 나 또한 지난가을 단풍든 속리산에서/ 법주사 종소리로 둥글어진 연밥 몇 개 사온 뒤/ 겨울 말미를 흠집 조금 내어 물에 담갔다
순 한방 샴푸 발라놓고 감는 머리/ 거품 꺼지는 소리 들려주던 세숫대야/ 그 세숫대야를 토실한 연밥에게 내어주고/ 그냥 수도꼭지에 목 들이밀고 기다리다 고개를 드는데 연밥도 머릴 감고 있었나!/ 꾸역꾸역 거품이다
오천 원에 열 알 덤으로 다섯 알 더 받아온 연밥/ 봄볕 찰랑이는 나의 세숫대야에 잠겨/ 몸 안 거품을 먼저 꺼내고서야 싹은/ 초록 틈새 벌리느라 팽팽한 신음이다
일주일 만에 열다섯 알이 동시에 아랫도리 벌리니 푸른 오줌발에 왁자해진 세숫대야/ 삐죽하게 고개 쳐드는 연의 줄기로 보아/ 머지않아 둥근 연잎이 넘쳐나겠지
누군가 흠집 내어 주길 기다리는 우주의/ 종소리들이 수돗물을 타고 내 정수리를/ 흠씬 적셨다
겨우내 얼어있던 2층 누옥의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천년전 연못에 드는 물길인양/ 진흙 속 노래가 좌르르 새어 나왔다
흘린 땀의 시간들 씻겨주던 세숫대야 안에서/ 그렇게 핀 연꽃의 언어는/ 천 년 후, 그녀 겨드랑이 향해/ 물씬한 내 살 냄새를 전송하고 있다
◇박윤배=1989년 매일신춘문예 등단
1996년 <시와 시학> 신인상
시집 <쑥의 비밀> <얼룩> <붉은 도마> <연애>
2009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감상> 연밥을 데려와서 내 일상을 그에게 일부 내어주며 성장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또는 조심스레 지켜보는 부모 같은 애틋한 마음과 천년의 오랜 세월을 이어주는 인연의 간절한 마음을 그려볼 수 있었다. 우리 세상일들은 자신의 간절한 소망에서 비롯되어 관심과 인내의 실천으로 성장하고 완성되어진다는 것을 나에게,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속삭이고 싶다. -달구벌시낭송협회 김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