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에
불혹에
  • 승인 2017.04.1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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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절정의 순간에 이른 절벽의 꽃을 부러워한다

그 비장미를

나이 먹을수록 제 안부터 허무는 느티나무를 부러워한다

그 적멸의 비움을

한여름 퍼붓고 절필한 소나기를 부러워한다

그 초연함을

폐곡선 안에서 나는 새를 부러워한다.

그 끝없는 시도를

대패로 깍을수록 속 깊은 결 더 뚜렷해지는 나무를 부러워한다

그 향기 나는 편향을

소나무의 많은 옹이들을 부러워한다

그 상처 진액에서 나는 솔향을

평생을 밭에서 일한 가난한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 가린 곳 없는 진면목을

모든 잎새와 풀 속에 깃든 연두를 부러워한다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색을

마침내 갈 곳 없어져 원점으로 돌아간 늪을 부러워한다

그 깊은 어둠을

허허벌판에 파다하게 핀 망초꽃을 부러워한다

그 생명의 아우성을

더러운 도랑에 꽃잎을 던지는 흰 목련을 부러워한다

그 거만한 자존을

흙 속에서 일제히 귀를 세우고 있는 씨앗들을 부러워한다

그 동지애를

가짜 종이돈을 진짜 돈처럼 꼭 쥐고 있는 티베트 할머니를 부러워한다

그 손때 묻은 간절함을

벼랑의 교만을 부러워한다

그 뒤돌아보지 않는 단호함을

◇류시화=1980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등

<감상> 세상을 보는 순수함은 너무 아름답고 편하다. 그러나 어느 날, 세상은 이런 게 아니라고 느끼는 순간, 편안함은 쉬이 왔을지 모르나 마음의 고독함은 쉽게 떠나지 않더라.

-달구벌시낭송협회 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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