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운 경사길 이론과 대머리의 역설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과 대머리의 역설
  • 승인 2016.11.0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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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논설실장
개인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도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잘 선택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흡사 어떤 협상에 있어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처음부터 자신이 갖고 있는 카드를 모두 양보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처럼. 한 개 한 개씩 양보하다 결국 모든 것을 양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잘 알면서도. 왜 그럴까? 처음부터 협상에 필요한 만큼을 양보하지 않을려는 심리는 왜일까?

이러한 물음에 답을 해주는 이론이 있다.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이 그것이다.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A를 허용함으로써 미래의 방향이 B를 향할지 모른다 가능성 때문에 A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미끄러운 경사면 위에 공이 하나 놓여 있고, 버팀목이 그 공이 굴러내려가는 것을 막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버팀목을 치우면 공은 경사면 아래까지 굴러가게 된다.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일종의 이와 같은 인과연쇄와 같다. 즉,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이 원인이 되어 다른 사건이 발생하고, 그 다른 사건이 다시 원인이 되어 또다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첫번째 사건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그 사례이다. 인간의 유전체가 갖고 있는 모든 비밀이 밝혀지게 되면, 일단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게 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면서 맞춤아기를 만들려는 시도도 벌어질 수 있고, 유전체에 의해 인간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유전자 조작도 광범위하게 벌어질 수 있다. 인간의 유전체에 대한 연구라는 공이, 미끄러운 경사면과 같은 인과연쇄의 끝에 도달하면 매우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무엇이 문제일까? 보수주의자들이 어떤 새로운 정책을 반대할 때 자주 등장하는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논리적 비약의 문제와 과도한 비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미래에 가져올 결과는 결코 우리가 절대적으로 알 수 있거나 예측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반대를 위한 논리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을만큼 완벽한 논리라기 보단 지나친 걱정의 표현일 수 있다.

물론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때론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떤 정책이 때론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도 시행과정에서 ‘대단히 비도덕적인 결과’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사길은 일단 한번 발을 내딛으면 다른 한편으로 옮겨가기 어렵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위 A를 허용했을 경우 빚어질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 이외에도 긍정적인 결과도 간과해선 안된다. 이런 점에서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접근하는 약점이 있다. 여기서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논리적으로 한계에 봉착한다. 그래서 이 이론은 ‘반대를 위한 반대’의 대표적인 캐치플레이즈가 되었다.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을 반박하기 위한 이론 중 대머리의 역설(Sorites paradox)이 있다. 흔히 회색지대의 문제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B는 까맣고 A는 하얗다는 것을 알지만, A가 어디서 끝나고 B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말할 수는 없다는 이론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위도 흑백을 분명하게 구별하기 쉽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조건 반대를 고집하는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일종의 종교의 교리와 같은 존재일 뿐인 것이다.

우리 사회도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의 마법에 빠진 것은 아닌 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 2차례 이뤄진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사과를 할수록 국민의 분노를 샀다.

‘작은 사과’가 통하지 않자 ‘좀 더 큰 사과’를 하는 심리에 국민이 실망한 탓이다. 이미 국민들은 ‘가장 큰 사과’ 수준에 머물러 있음에도 박 대통령은 국민과 다른 거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사과’가 자칫 ‘정권 퇴진’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도출하지 않을까 박 대통령은 걱정한 탓은 아닐까?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잘못된 오류임에도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굳게 신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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