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 동부민요 전수자 박수관 명창
<문화인> 동부민요 전수자 박수관 명창
  • 황인옥
  • 승인 2013.08.0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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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놓는 날까지 노래하고 제자들 가르치는게 숙명”

초등 6학년때 김로인 명창 만나

본격적인 ‘동부민요’ 배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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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관 명창은 “기술이 아닌 진정한 예술인이 되기 위해서는 소리에서 장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객원기자 이명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연중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도시 전체가 대를 이어 먹고 산다.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인 고흐박물관을 보기 위해 세계인들이 이 도시를 찾고 있다.

해마다 8월 중순이면 영국 스코틀랜드의 소도시 에딘버러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방문하는 외국인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세계 최대 축제인 ‘에딘버러 축제’가 시작되면 이 작은 도시는 60여 개국, 1000여 개의 축제 참가팀과 갑자기 불어난 외국인들로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동부민요 전수자인 박수관(58) 명창은 좀 다른 방식으로 세계인을 우리 안으로 끌어 들인다. 동부민요로 세계 유명 무대를 누비며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십 수 년을 매달려 왔다.

대한민국의 전통문화가 제2의 암스테르담과 에딘버러가 되기를 꿈꾸며 ‘세계로의 찾아가는 공연’을 펼쳐온 것이다. 감동하고,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찾아 가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것이 순서라는 소신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구성진 동부민요 가락을 세계인의 가슴에 심고 있다.

박수관 명창 그를 만난 날은 세찬 소낙비가 내리는 한여름의 오후였다. 마른장마로 타들어가던 대구의 갈증을 적셔주던 지난 2일의 일이다. 소낙비의 청량감을 닮은 듯, 하얀 모시 적삼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부채 자락에 멋을 실은 그가 환한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50대 후반이라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강렬해 보였다.

◇한국 전통민요로 국위를 선양하다

박수관 명창은 500차례가 넘는 공연, 400여 차례의 언론 노출, 헤아릴 수 없는 이력과 수상경력 등 경이로운 성취를 이루고 있는 소리꾼이다. 특히 우리 전통 민요를 해외에 알려 국위를 선양한 노력들이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델픽세계무형문화재 지정, 아시아인 최초 ‘아프리카 로열 어워드’ 수상, 프랑스IRMA세계전통음악가 인명사전 한국인 최초 등재, 미국 대통령상, 러시아 타워상 등을 수상하며 해외 유수의 기관에 이름을 올렸고, UN(FAO)본부, 미국 카네기 메인홀, 미국 케네디 센터 콘서트홀, 링컨 센터, 러시아와 독일의 국제 음악제, 프랑스 르망 국립 콩째르 잘 극장, 아프리카 왕족회의 축하 공연 등 음악인들의 꿈의 무대도 밟았다. 이 정도면 세계의 유명 음악인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해외 경력이다.

- 박수관 명창의 명성은 해외에서 먼저 시작됐다고 들었습니다.

“1996년 러시아 이르쿠츠크 국립사법종합대학교에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 초청돼 ‘한국 부전 민요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한 것이 시발점이 됐어요. 당시 논문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직접 심사위원들 앞에서 동부민요를 불렀는데 그때 동부민요를 처음 접한 러시안 관계자들이 굉장한 감동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후 러시아 바이칼스크 국제음악제,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글링카 국립음악원 등에서 초청돼 한국의 전통문화를 러시아에 심어 왔지요.”

-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특별한 분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로마 기오네 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스승이신 ‘쥬세테 타테이’라는 분이 저의 소리를 듣고 ‘내 평생 이렇게 훌륭한 소리는 처음 들었다’며 극찬을 받았지요. 우리 소리의 내공을 해외 유명 음악인들로부터 인정받는 감동을 경험했어요.”

- UN(FAO)본부 무대, 미국의 카네기 메인홀이나 케네디 센터 콘서트홀은 서양 음악인들도 서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인데 한국의 소리꾼이 이 무대에 섰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데요.

“당시가 2002년이었는데 우리나라 국악인으로서 최초였죠. 2시간 동안 동부민요를 불렀는데 청중들이 열광하고 현지 언론이 극찬했어요. UN본부의 공연에서는 FAO본부 국장과 198개국의 대통령과 대사, 각료 대표 등 세계의 리더 1,800여명이 참석했는데 ‘놀랍다. 한국의 전통음악이 이렇게 훌륭한 줄 몰랐다’며 한국전통민요의 우수성에 감탄을 보내 주었어요. 특히 세계 지도자들에게 우리 전통민요를 소개했다는 것이 저로서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어요.”

- 아프리카 왕족 포럼 무대는 당시 한국과 리비아간에 외교 갈등을 해결하는데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제가 무슨 크게 기여한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술의 힘은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화합을 시켜주는 큰 마력이 있는 것은 맞아요. 가다피의 초청으로 국가원수궁에서 공연을 했는데 가다피가 크게 감동했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이후 한달 뒤 국교 정상화가 되었는데 이것을 저는 오비이락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일한 동부민요 전수자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다

많고 많은 전통민요 전수자들 중에서도 그가 유독 조명 받는 이유는 함경도와 강원도, 경상도까지를 아우르는 동부민요의 원형을 두루 섭렵함에 있다. 각각의 지방의 민요 전수자는 쉬 접할 수 있어도 세 지방의 민요를 두루 섭렵한 이는 박수관 명창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 소리는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7살 때로 기억되네요. 소리가 뭔지도 모르고 거지들의 각설이 타령을 따라다니고 상여꾼의 소리나 장터의 노래패들에 혼을 빼앗기곤 했지요. 지금도 하루 종일 노래만 부르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노래하는 것이 즐거워요. 소리에 대한 끼와 열정을 타고 난 것 같아요.”

- 본격적인 소리공부는 누구에게 받았나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갔는데 거기서도 밴드부에서 타악을 치며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다가 우연히 저의 스승인 ‘김로인’ 명창을 숙명처럼 만나게 됐지요. 그분은 1·4 후퇴 때 월남한 분으로 동부민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시면서도 도인처럼 초야에 묻혀 사시는 분이셨죠. 그때 까지는 혼자서 바닷가나 길거리에서 소리를 했어요. 앞에 가는 처녀를 보면 ‘앞에 가는 저 처녀 엉덩이 좀 보소 한들한들 하는 것이 송아지 닮았네’하며 즉석 소리를 하다가 뺨을 맞은 적도 있죠. 그러다보니 혼자 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찾게 됐고, 부산진역 후미진 곳을 발견하게 됐죠. 거기서 혼자 노래하는 저를 저의 소리 스승이신 김로인 선생님께서 발견하시고 소리를 배워주겠다고 사사하면서 본격적인 동부민요에 대한 배움이 시작된거죠.”

- 그분의 소리는 어땠나요.

“처음 선생님의 소리를 듣고 ‘이런 소리도 있었구나.’ 신천지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천상의 소리 같았죠. 지금까지도 그런 노래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아요.”

- 전통음악은 배우는 과정이 혹독하다고 들었는데 어땠나요.

“선생님께서는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치는 구전심수(口傳心授)와 도제(徒弟)식 수업을 하셨어요. 당시 동부민요 뿐만 아니라 팔도민요는 다 배웠던 시기였죠. 호방하고 애절하기 그지없는 동부민요가 저와 잘 맞아 동부민요에 집중하게 된 것이죠. 스승의 가르침이 스펀지처럼 흡수되던 행복한 시기여서 힘든줄도 몰랐어요.”

-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와 달리 동부민요는 일반인에게 생소한데.

“태백산맥 동쪽의 강원도, 함경도, 경상도 지방의 민요를 통들어 동부민요라 해요. 같은 동부 민요지만 지역에 따라서 창법의 차이와 음계 꾸밈음의 차이가 있죠. 정선 아리랑, 치이야 칭칭나네, 영남들노래, 상여소리 등이 대표적인 동부민요에요.”

-스승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었죠.

“노래는 목이 아닌 가슴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 인위적으로 꾸미는 소리보다 자연에 가까운 소리, 멋대로 부르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준 원형대로 부를 것, 남 앞에서 소리하지 말 것 등 네 가지를 주문하셨어요. 3년 정도를 배웠는데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홀연히 선생님이 떠나셨어요. 그때가 중3때 였죠.”

- 선생께서 떠나시고도 소리는 계속 됐겠죠.

“혼자서 소리와 사투를 벌였죠. 배운 것을 숙성하는 시간이라고 할까요. 세상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한 시기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남들 앞에서 노래하지 말라는 스승의 유지를 따르느라 40대가 가까워질 때까지 남 앞에서는 노래를 하지 않았죠.”

-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은데요.

“스승이 떠나시고 25년은 혼자 지독하게 연습하는 시기였어요. 동부소리는 세 지방의 소리가 합해져야 하나의 정파가 나오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웠죠. 제가 이후에 정규교육에 편입해 소리를 배웠다면 동부소리의 원형이 변형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온전한 동부민요로 세상에 나온 것은 1993년도로 기억되네요.”

◇동부민요의 원형 보유자로서의 가치를 재창출하다

그의 이력 앞에는 동부민요의 원형을 전수받는 소리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서울대학교 국악과 한만영 전 교수는 ‘동부민요를 올바르게 전수받은 창자(唱者)’라고 했고, 한국고음반연구회장 및 전 판소리학회장인 이보영씨는 “박수관 명창은 동부민요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며 추켜세울 정도로 그는 동부민요에 중요한 인물이 됐다.

원형을 보유한 박수관 명창의 가치가 묵직한 이유는 많다. 고유성, 정체성, 규범성이라는 동부민요의 원형 계승, 동부민요로 해외에서 국위 선양, 동부민요의 맥을 잇는 제자 육성, 세계의 다양한 음악인들과 동부민요의 협연 등을 통해 동부민요의 발전을 이끌고 세계화에 기여한 공로 등이 그것이다. 이는 국악인 최초 한국을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제29회 대한민국국악제에서 아리랑 5대 명창 선정, 제2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일반부 대상인 국무총리상, 제7회 서울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등을 수상하며 국내에서도 인정받는 원동력이 됐다.

- 쇄도하는 해외로부터의 러브콜로 해외 활동이 많은 가운데서도 동부민요 전수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난 2010년부터 대구예술대학교에서 한국음악과 석좌교수로 제직한 바 있고, 또 개인적으로도 제자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 후배들에게는 어떤 스승이신지요.

“저의 스승의 4대 가르침을 저 역시 제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하면서도, 소리야말로 그 사람의 인품을 담는 그릇인 점을 강조하며 소리와 내면 모두를 가꿀 것을 강조해 오고 있어요.”

- 많은 일들을 하셨는데도 여전히 목말라 보입니다.

“제가 숨을 놓는 그 순간까지 노래하고 제자들 가르치고 동부민요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며, 그것을 제가 세상에 온 숙명으로 여기고 살고 있습니다.”

- 선생님에게 소리는 어떤 것인가요.

“소리를 연습 할 때면 온 힘을 쏟아 붓지요. 하지만 어느 단계가 지나면 자가가 자기 소리에 빠져서 환희심을 느끼는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게 돼요. 허공 속에 울려 퍼지는 자신의 소리를 만나는 기쁨은 형용할 수 행복감에 빠지게 하죠. 자기 소리에 자기가 미치는 것 그게 소리입니다.”

- 좋은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둘째도 반복이에요. 기술과 예술은 모두 반복 연습이라는 뿌리에서 출발하지요. 하지만 기술이 아닌 진정한 예술인이 되기 위해서는 소리에서 장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세워야 해요. 스스로 몸과 마음을 꼿꼿하게 세우고, 오직 소리 하나에 자신을 던져야 하는 피나는 시간들이 뒤따라 겠지요. 소리에 장인 정신을 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소리꾼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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