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는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보람 찾는 일”
“봉사는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보람 찾는 일”
  • 김무진
  • 승인 2014.02.2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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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인>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오금희 씨

2005년 적십자 봉사회 입회 후 현재까지 6천여 시간 활동

2007년 홍보부장에 위촉…봉사 이끄는 중간다리 역할

사회복지학 늦깎이 학업 열중 노인들 위한 전문지식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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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구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오금희씨가 환한 미소를 띄며 웃고 있다. 김무진기자

대한제국 말기인 1903년 1월 8일 대한제국 정부가 최초로 제네바 협약에 가입하고, 2년 뒤인 1905년 10월 27일 칙령 제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이 제정·반포되며 처음 설립된 대한적십자사는 △인도 △공평 △중립 △독립 △자발적 봉사 △단일 △보편 등 7대 기본원칙을 바탕으로 현재 많은 적십자사 봉사원들이 봉사활동을 통해 사랑과 나눔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서울을 비롯해 대구와 경북 등 전국 각 광역시 및 도에 지사와 함께 병원, 혈액원, 회관, 봉사관 등을 두고 적십자 기본원칙과 국제회의 결의사항 등에 입각해 인도주의 사업을 수행한다.

적십자사 대구지사는 1949년 10월 발족 이래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인간존중을 보장하는 적십자 이념에 따라 지역민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 대구지역에는 5천여명의 적십자 봉사원들이 가족과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어려운 이웃들의 아픔을 정성으로 어루만지며 활발히 봉사활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특히 현재 대구 적십자사의 봉사활동에 있어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데 앞장서는 봉사원들의 각종 활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취재하며, 이를 적극 알리는 인물이 있어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대구 적십자사 봉사원들의 ‘숨은 진주’로 불리는 오금희(여·51)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2005년 봉사원으로 입회한 뒤 2007년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봉사원들의 숨은 봉사활동을 알리는 ‘희망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오씨는 대구 적십자사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최근 대구시내 한 커피전문점에서 대구 적십자사 봉사원인 오금희씨를 만나 그가 몸소 펼치고 있는 크고 작은 봉사활동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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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2월 폭설이 내린 경북 포항 죽장면 지역에서 제설작업 봉사를 펼친 오금희(왼쪽에서 두 번째)씨가 함께 봉사에 나선 적십자사 봉사원들과 기념촬영을 갖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협의회 봉사원이 되다

오금희씨의 적십자사 대구지사에서의 봉사활동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남편에 의해 시작됐다.

1995년 남편이 대구의 모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근무할 당시 전업주부이던 오씨에게 “너무 집에만 있지 말고 세상에 한 번 나가 주위를 돌아봐라.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말을 한 것이 봉사활동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당시 남편의 월급이 30만원이었는데 뒤늦게 남편이 지역의 한 복지관에 월급을 쪼개 일정액을 후원하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오씨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남편이 남몰래 기부활동을 하고 있던 사실을 알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며 “나중에 애들이 어느 정도 크면 꼭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그의 마음 속 결심은 10년 후 실천에 옮겨졌다. 2005년 남편이 또 다른 대구의 한 동 주민센터에서 근무할 때 평소 남편과 잘 알고 지내던 지역 부녀회장의 권유로 그해 10월 대구 적십자사 봉사회 동구 효목2동 목화봉사회에 입회하며 본격 봉사활동에 나섰다.

오씨는 “집에서 살림만 하던 전업주부 생활을 하다 적십자 봉사원으로 등록, 봉사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됐다는 것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했다”며 “난생 처음 봉사활동에 나섰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의 첫 봉사활동은 대구의 한 복지관에서 홀몸노인, 조손가구, 모자세대 등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밑반찬 조리 봉사였다.

오씨는 “처음 조리 봉사활동을 했을 때 많이 힘들었지만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 힘든 줄 모르고 했다”며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재미와 보람은 물론 뿌듯함을 맛보는 행복감이 더 컸다”고 강조했다.

이후 오씨는 홀몸노인들에게 안부전화 하기를 비롯해 장애인 물리치료 보조, 장애인 말벗 및 노래 불러주기 등의 봉사활동을 계속 이어왔으며 현재 봉사시간만 6천여 시간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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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열린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장애인 게이트 안전 담당 봉사활동을 펼쳤던 오금희(왼쪽에서 네 번째)씨가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기념촬영을 갖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봉사원들의 활동을 알리는 홍보기자 활동

오씨가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봉사원들의 ‘숨은 진주’가 된 것은 독서 및 글쓰기 등 평소 취미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2005년 동구 효목2동 봉사회 소속 봉사원으로 입회할 당시 가장 막내였던 오씨가 크고 작은 봉사활동을 몸소 실천하며 열심히 활동을 펼치자 동구지부협의회 선배 봉사원들은 이를 눈여겨보고 오씨를 아꼈다.

이후 2년 후인 2007년 선배 봉사원들은 그의 글쓰기 솜씨 등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대구 적십자사 봉사회 동구지부 홍보부장으로 추천, 위촉했다.

오씨의 역할은 동구지구협의회 내 단위 봉사회별 또는 지구 전체 큰 행사가 있을 때 봉사원들의 활동을 취재하고, 사진을 찍으며 글을 써서 알리는 일이었다.

특히 홍보부장이란 직책을 맡자 당시 남편은 비교적 고가였던 디지털 카메라를 선물하고 오씨를 격려하기도 했다.

남편의 외조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오씨는 봉사원들이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홍보 및 지원활동에 매진했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카페를 개설, 봉사원들의 각종 활동을 인터넷에 올려 홍보하는 등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홍보부장을 맡은 지 1년이 채 안돼 대구지사협의회 홍보분과 위원장을 맡기에 이르렀다.

오씨는 “평소 글 쓰는 것과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직접 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며 “처음에는 홍보 글 하나를 쓰는 데 하루 종일 걸리는 등 많은 애를 먹었지만 끊임없는 노력 끝에 조금씩 감이 잡히면서 점차 나아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가 열심히 한 만큼 대구 적십자사 봉사회가 정말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전국에서도 많이 알아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러한 것들이 홍보기자 일에 열정을 바치게 된 원동력이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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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열린 대구 동구청의 대구 적십자사에 대한 특별회비 전달식에서 오금희(왼쪽 첫 번째)씨와 남성희 대구 적십자사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 이재만 전 동구청장, 봉사원들이 기념촬영을 갖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봉사원 및 홍보기자로서의 보람과 애로사항

오씨는 숨은 참 봉사자들을 발굴해 이들을 많은 시민들에게 소개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정의했다.

오씨는 “적십자사 봉사회 홍보기자 및 각종 봉사활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은 비록 조금 피곤하지만 발걸음도 가볍고 자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좋다”며 “더욱이 오랜 세월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남편의 외조가 많은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적십자사 봉사원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에 대해 지난 2010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체험 수기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표창을 받았던 때라고 회상했다.

봉사활동을 하던 틈틈이 오씨는 2007년 요양보호사 제도가 시행되자 곧바로 관련 교육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 요양보호사 일을 병행했다.

이 같은 경험을 토대로 그는 2010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체험 수기 공모에 ‘요양보호사는 내 딸’이라는 제목으로 응모,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당시 각각 중학생과 고등학생이던 아들과 딸을 데리고 서울의 시상식장에 데리고 갔다.

오씨는 “엄마가 반듯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애들과 함께 시상식장에 갔는데 인상이 깊었던지 딸이 ‘엄마. 나도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해 이후 ‘가족봉사원’으로 등록하고 아이들과도 함께 틈틈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며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살아 있는 참 인성교육이라 생각되고, 봉사를 하러 다니면서 가족 간 정도 더욱 돈독해지는 등 ‘인생 최대의 엔돌핀’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가정주부, 봉사원, 요양보호사 등 하루에도 몇 가지씩 일을 하다 보니 몸이 좀 힘든 애로사항이 있다”며 “아울러 이 때문에 집안 일을 조금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아이들과 남편에게 많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

오씨는 2012년 대구보건대학교 원격평생교육원 사회복지학과에 등록하며, 늦깎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오씨가 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요양보호사 일을 병행하며 아픈 노인들을 자주 접하면서 전문지식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오씨는 “최근 요양보호 현장에서의 체험 결과 노인 치매 문제가 많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고 사회복지학 공부를 통해 체계적인 지식을 토대로 홀몸노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활용코자 늦은 나이게 공부를 시작했다”며 “자원봉사는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보람을 찾는 일이며, 숨어 있는 봉사자들을 알리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봉사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앞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김무진기자 jin@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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