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대한 욕망 줄고, 사람 귀하게 여기는 마음 커져”
“돈에 대한 욕망 줄고, 사람 귀하게 여기는 마음 커져”
  • 황인옥
  • 승인 2013.04.2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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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 오지여행가 도 용 복 사라토가 회장

사업 성공 후 몸 아파 여행 시작…20여년간 130개국 다녀

대구서 아마존 자연·원주민 삶 담은 ‘자연과 사람’ 사진展

국내선 월 20회 이상 강의로 젊은이들에 끊기와 열정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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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용복 회장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해서 시야와 안목이 넓어지고 그로 인해 통찰력도 깊어져 정확한 판단력으로 성공으로 이끌게 하는 영혼의 터치”라고 말했다.
인간 수명 100세 시대에 ‘인생 60부터’라는 말은 자연스럽다. 이 자연스러움에는 ‘여전히 건강한 육체에, 경험과 지혜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를 60대로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돼 있다. 열정과 용기만 있다면 60년의 시간이 묵혀 낸 지혜와 경험으로, 그 세대의 장점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일에 새롭게 도전해 볼 만한 나이다. 어느 세대에게나 그렇듯 그들에게도 ‘길은 무한히 열려 있으되, 선택은 개인의 몫’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오지여행가 도용복씨에게라면 ‘60 예찬론’은 옹색하다. 인생의 최고조를 달리고 있는 70세인 그에게 ‘인생 60부터’라는 사회적 수렴은 부자유스럽다. 그에게 당연히 따라붙을 수 있는 노년이라는 수식어도 왠지 민망하다. 5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길 만큼 젊고 건강한 육체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사그라들지 않는 열정이 강렬하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도 회장에게 ‘인생 70부터’라는 표현도, ‘인생 80부터’라는 수식어도 아직은 보류 상태다. 그는 여전히 진화중이며, 그 끝이 어디일지 알 수 없어 그렇다.

도용복 회장은 사라토가라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자수성가한 CEO이자 오지여행가로 한창 핫(HOT)하게 떠오르는 인물이다. 은퇴를 준비해야 할 50대에 오지여행이라는 새로운 길에 도전해 130여 개국의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며 오지여행가라는 콘텐츠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뿐이 아니다. 부산에서 골프공 제조업을 하는 성공한 CEO, 전국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한 달에 많을 때는 25회 이상의 강연을 펼치고 있는 인기 강사라는 그의 화려한 이력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오지에서 ‘나’를 돌아보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지난 23일 대구에 온 그를 만나기 위해 대구문화예술회관을 찾았다. (사)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자연과 사람’ 사진展에 참여하는 그를 보기 위해서다. 한국보도사진가협회 수석부회장인 권정호 한국보도사진가협회 수석부회장과 함께 그의 사진전이 열리는 첫 날 오픈식에 참석한 것이다. 권 수석부회장은 갈라파고스의 자연을, 도 회장은 아마존 원주민의 때 묻지 않은 원형의 삶을 담은 사진을 오는 28일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의 첫인상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감지됐다. 배용준의 바람머리가 잘 어울렸다. “5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다”는 질문에 “그런가. 감사하다”며 호탕한 웃음을 날렸다. 호감어린 첫인상으로 그와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활동 무대가 부산이신데 이번 전시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습니까.

“저는 사진 전문가는 아니고, 오지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 아마추어 작가입니다. 제가 본 오지의 아름다운 자연과 원주민들의 삶을 주위의 분들과 나누고 싶다는 바람으로 부산 용두산 공원과 부산역 등에서 지난해 12월부터 전시회를 가져왔는데, 그때 저라는 사람이 알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여기저기서 전시회 요청이 들어오고 있던 중에 대구에서도 연락이 온 거죠.”

-오지여행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습니까.

“시작은 50대 초반입니다. 남들보다 앞선 30대 중반에 죽을 고생하며 사업을 성공시켜 놨는데, 40대가 되니 청천벽력같이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고혈압, 당뇨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로감까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죠. 그게 베트남 참전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지요. 이러다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세상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떠난 첫 오지여행지가 아프리카였습니다.”

-왜 몸도 좋지 않은데 하필 여행자에게 녹록치 않은 아프리카였습니까.

“몸이 쇠약해지자 힘든 곳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보다 더 척박한 환경과 사람들을 보며 용기와 희망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까지 20년을 오지여행을 다니신걸 보면 첫 여행지의 기억이 좋으셨나 봅니다.

“그곳을 다니면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50~60년 전 어려웠던 우리의 과거를 만난 것이지요. 그들을 통해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깨닫게 됐고, 다시금 저를 일깨우고 채찍질하는 계기로 삼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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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용복 회장이 오지여행 중 만난 현지 어린이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년간 다닌 여행지가 상당하겠는데요.

“예. 어느새 130여 개국이 됐네요. 20년이라는 시간도, 130여 개국이라는 규모도 돌이켜보면 찰나처럼 느껴집니다.”

-20년이란 긴 오지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셨는지요.

“여행을 하기 전까지 저는 그저 돈 버는 기계에 불과했었어요. 몸이 아파 여행을 시작했지만 여행을 할수록 몸도 마음도 좋아지면서 돈에 대한 욕망보다 자연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나눔에 대한 열망이 더 커져가는 걸 느꼈죠. 인생의 품격 같은 것도 느끼게 됐고요. 인생의 맛도 곰삭은 듯 깊게 숙성되는 것 같았습니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런 귀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지, 그 즐겁고 행복한 섭렵

-지금처럼 계속 오지여행을 하실 건가요.

“처음 제 목표는 60대까지 여행하고, 그 뒤부터는 국내여행을 목표로 했는데 막상 70대가 되도 제 건강이 여행을 다니기에 충분한 상태였고, 그래서 80이 되지 전까지 200개국으로 목표를 늘렸습니다.”

-탐험하신 그 많은 오지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는다면.

“당연히 아마존입니다. 아마존은 지구촌 공기의 4분의 1을, 지구촌 담수의 5분의 1을, 2만4여 천종의 생물을, 8천여 종의 어종을, 8천7백여 종의 야생조류들이 살고 있는 인류의 미래지요. 그곳은 우리의 고향 같은 곳이지요. 이번 전시에도 그곳 원주민들의 삶과 자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여행스타일이 특이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건가요.

“제가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현지의 구두닦는 아이나 거리악사들을 여행가이드로 활용하지요. 그들과 함께 여행하며 그 지역의 음악들을 함께 부르며, 그 지역의 문화와 음악들을 섭렵하는 방식이지요.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겠습니까.”

그의 강연 주제가 ‘음악이 있는 세계문화기행’ 이 된 것도, 전국 각지의 대학과 공공기관에서 그의 강연이 인기를 누리는 이유도 모두 현지인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며 오감으로 체험한 독특한 그의 여행 방식에 있었던 것이다. 여행에는 감미롭고 달콤한 음악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오지 여행이 아니던가. 그는 “죽을 고비도 몇 번을 넘겼지요”라며 남의 일인 듯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어 “여행 도중 다른 여행자의 가이드가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것을 제가 업고 뛴 적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결국 죽었지요. 그 일을 겪은 이후로 여행을 떠날 때 항상 유서를 써놓고 갑니다”며 비장함을 보이기도 했다.

-회장님은 자신이 천수를 누릴 것이라는 하늘의 명을 알고 있는 운명론자처럼 계속해서 위험한 곳에 도전장하고 계십니다. 그 무모한 용기는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저는 6·25를 겪은 세대입니다. 제가 8살 무렵일 때 피난을 갔는데 그게 다부동 근처였습니다. 다부동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마지막 혈전이 치뤄졌던 곳이었죠. 당시 제가 굶주림을 참지 못해 전장 한가운데를 찾아가 지게로 총알이나 군인들의 밥을 지고나르는 일을 자처했지요.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저는 밥을 위해 전장터에 기꺼이 나갔죠. 그때부터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봐야죠.”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스스로 베트남전에 자원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거군요.

“베트남전에 자원한 사람은 그 많은 군인들 중에 저 혼자뿐이었죠. 저는 전쟁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미 전쟁을 제대로 경험해봤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돈을 벌어 종잣돈을 마련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도 두려움보다 도전을 하게 만든 이유가 됐겠네요.”

-세상에 회장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요. 아무리 그렇지만 남들은 10개월을 최대로 가는데 회장님은 그곳에서 장장 햇수로 3년(약 20개월)을 견디셨는데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해답은 ‘좋은 인연’입니다. 저라고 그 긴 세월 전장터에 있었는데 죽을 고비가 없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좋은 인연들이 나타나 저를 도와주고 살려주었던 거지요.”

-1년에 65일 가량은 외지여행을 하시고, 나머지 300일은 국내에 머물며 사업과 강연으로 시간을 보내신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한 달에 15~20회, 많을 때는 28~29회 이상의 강연을 하신다면서요.

“주로 대학과 공공기관의 공무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합니다. 음악을 주제로 제가 경험했던 각 여행지의 문화와 자연을 소개하는 형식입니다.”

◇여행, 성공을 부르는 영혼의 터치

-특히 젊은 대학생들이 많은 감화를 받고, 회장님을 멘토로 삼는다면서요.

“지금까지 우리 세대가 전쟁의 폐허 위에서 경제적인 부를 이뤄놨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그것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근기와 열정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려고 해 왔습니다.”

자수성가한 그다. 사업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지금 그의 명함에는 그의 사업체인 사라토가 회장의 직함이 박혀있다. 골프공을 만드는 꽤 건실한 중견 제조업체다. 베트남에서 목숨 걸고 벌어 온 피 같은 종자돈으로 일군 성공이니 어떤이의 성공보다 값져 보인다.

-회장님처럼 죽기 살기로 하면 성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오셨는데, 사업이야기 좀 해 주시죠.

“고향이 안동인데 전쟁 끝나고 시골에서는 답이 안 보이더라군요. 그래서 도시로 와서 고생고생하며 못다한 학업을 마칠 수 있었지만, 사업으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은 결국 베트남전 자원이라는 벼락전술을 선택하게 했죠. 베트남에서 목숨을 담보로 벌어 온 종잣돈으로 삼성전자 대리점을 시작해 큰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성공에 대한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고, 결국 지금의 사업체를 일구는 데 까지 와서야 멈출 수 있었지요. 그것도 몸이 신호를 보내와서….”

그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그를 붙잡아 준 것은 음악이었다. “어릴 적 유년 시절 집 마루에 놓여 있던 바이올린과 오르간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로도 음악에 대한 도전은 계속됐지요. 음악을 매개로 한 오지여행으로 건강도 되찾았죠. 음악과 저는 찰떡 궁합인 셈이죠.”

그는 단순히 듣기만 하는 음악 마니아가 아니다. 세 자녀를 유럽으로 음악유학을 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역시 오랫동안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은 오페라와 뮤지컬 무대에도 서는 프로 못지않은 실력을 자랑하는 음악에 있어 적극적인 가담자편에 서 있다”는 그다. 국내는 물론 엘사바도르의 연인으로 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사라토미는 그의 막내 딸이다. 엘살바도르 명예영사로 활동하던 그가 맺어준 엘살바도르와의 귀한 인연이다.

70대 초반에 오지여행가라는 콘텐츠로 시대적 아이콘이 된 그에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그는 “여행은 늘 새로운 우주의 기를 받는 길 위의 움직이는 학교 같은 것”이라며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해서 시야와 안목이 넓어지고 그로 인해 통찰력도 깊어져 정확한 판단력으로 인생이나 일을 성공으로 이끌게 하는 영혼의 터치”라는 말로 그의 여행론은 마무리됐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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