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마을이야기] 돌담길 걷다보니 ‘여기가 천하명당’
[예천 마을이야기] 돌담길 걷다보니 ‘여기가 천하명당’
  • 김상만
  • 승인 2015.08.2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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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경상북도 마을이야기-예천 금당실마을

임진왜란 때도 온전…십승지 중 하나

마을 곳곳 고인돌…청동기시대 추정

예부터 많은 인재 배출 ‘반서울’ 불려

천연기념물 지정 ‘금당실송림’ 명물

연못 끼고 천연 암벽 위 정자도 볼거리
/news/photo/first/201508/img_173861_1.jpg"금당실마을전경/news/photo/first/201508/img_173861_1.jpg"
금당실마을은 예로부터 ‘반서울’이라고도 했다. 서울의 절반 정도라는 말이다. 조선 건국 당시 태조가 도읍지를 정할 때 후보지로 거론됐으나 큰 물줄기가 없어서 아쉽게 서울이 되지는 못했다. 작은 마을에서 수많은 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마을 전경.
나라에 흉년, 전염병, 전쟁이 닥쳐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천하의 명당. 조선시대부터 민간에 널리 유포된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서 말하는 십승지(十勝地) 중에는 유난히 경북 북부지역이 많다.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예천 금당실마을은 임진왜란 때도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 앞을 흐르는 금곡천에서 사금이 나왔다고 해서 ‘금당실’이라 불렸다. 마을 지형이 물에 떠 있는 연꽃을 닮았기 때문에 금당(金塘)이라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마을 안 곳곳에 30여 개의 고인돌 무덤이 있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청동기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서는 600여 년 전, 감천 문씨가 이곳을 개척했으며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금당실마을은 예로부터 ‘반서울’이라고도 했다. 서울의 절반 정도라는 말이다. 조선 건국 당시 태조가 도읍지를 정할 때 후보지로 거론됐으나 큰 물줄기가 없어서 아쉽게 서울이 되지는 못했다. 작은 마을에서 수많은 급제자를 배출하니 한양처럼 인재가 많다고 하여 반서울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news/photo/first/201508/img_173861_1.jpg"마을
마을 고택을 잇는 7.4km의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하기도 좋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소담한 돌담길이다. 마을 입구 용문면사무소 옆 당산나무에서 시작돼 방사 형태로 뻗어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마치 미로 같다. 길이가 7.4km에 달한다. 제주도의 돌담이 화강암으로 낮게 쌓은 담이라면 금당실의 돌담은 강가나 밭에서 나온 돌로 담장을 높게 쌓아 올렸다. 제주도보다 두 배 정도 높은 편이다. 옛날에는 한 번 들어서면 출구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단다. 돌담 사이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를 보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일상 속 쉼표를 찾은 기분이다.

금당실마을에는 조선시대 양반가의 생활을 보여주는 고택이 많이 남아있다. 당산나무 옆 가옥은 사괴당이다. 집을 지은 변응녕의 호를 따서 사괴당이라 부른다. ㄷ자형의 안채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건축됐는데 공간의 구분이 명확하고 안방 창호가 모두 두 짝 여닫이 세살문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집 앞에 정자를 짓고 못을 파서 자연을 즐기며 시를 읊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자나 연못은 남아있지 않다.

돌담길을 따라 마을의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반송재 고택을 만난다. 조선 숙종 때 도승지, 예조참판을 지낸 김빈이 낙향해서 살던 집이다. 영남 북부 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주택의 가옥 배치법을 따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구한말에 가세가 기울어진 자손들이 집을 팔려고 내놓자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이유인이 매입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news/photo/first/201508/img_173861_1.jpg"금곡서원/news/photo/first/201508/img_173861_1.jpg"
마을 가장 안쪽에는 함양 박씨 3인의 학문을 기리는 금곡서원이 있다.
마을 가장 안쪽에는 함양 박씨 3인의 학문을 기리는 금곡서원이 있다. 치암 박충좌 선생을 모시던 안동의 역동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지고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금곡서원에 복원됐다. 그의 후손인 행정 박눌과 남야 박손경을 좌우에 봉안했다. 서원의 규모는 작지만 강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세워진 서재를 보면 당시 유생들의 열렬한 학구열을 느낄 수 있다.

/news/photo/first/201508/img_173861_1.jpg"금당실송림/news/photo/first/201508/img_173861_1.jpg"
금곡서원 옆으로 금당실마을의 또 다른 명물인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당실송림을 마을 사람들은 ‘금당실쑤’라고 부른다.
금곡서원 옆으로 금당실마을의 또 다른 명물인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당실송림을 마을 사람들은 ‘금당실쑤’라고 부른다. 풍수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송림에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1892년 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들과 금당실 사람들이 충돌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과 러시아의 외교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고심 끝에 공동재산인 소나무를 베어 팔기로 협의했다. 장장 2km가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800m 정도로 줄어든 까닭이다.

당시 러시아와의 원만한 해결을 도왔던 양주대감 이유인은 베어낸 소나무가 너무도 안타까워 다시 숲에 나무를 심고 잘 가꾸도록 당부했다.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사산송계를 결성했고 11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이어 내려와 송림을 지키고 있다.

금당실마을의 수많은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유인이다. 이유인은 명성황후의 단골무당으로 신임을 받았던

신령군의 치맛바람으로 벼락출세를 했던 인물이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아 양주목사, 경상감사, 한성판윤, 법부대신 등의 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이유인은 금당실에 99칸의 저택을 마련할 만큼 막대한 자금을 가진 재력가였으나 집을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을 반강제적으로 노역에 동원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반감을 품은 일꾼들은 집의 기둥을 거꾸로 세워 집을 지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유인의 후손에 이르러서는 이 집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지금은 터와 돌담 일부만 남아있지만 그 흔적만 보더라도 구한말 권력가의 높은 세도를 엿볼 수 있다.

금당실마을에서 차로 5~10분 거리에 위치한 초간정과 병암정도 반드시 들러보자. 초간정은 우리나라의 최초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가 지은 정자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612년에 고쳐지었고, 이후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타 1642년에 중건했다. 지금 건물은 1870년 후손들이 새로 고쳐지은 것이다. 암반 위에 막돌로 기단을 쌓아 올린 초간정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선조들의 무위자연 사상을 보여준다. 바위를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가 시원한 운치를 자아낸다.

병암정은 연못을 끼고 천연 암벽 위에 세워진 정자다. 드라마 ‘황진이’에서 하지원이 장근석을 만나는 장면을 찍은 장소로도 유명하다. 조선 말기 이유인이 낙향해 옥소정이라는 이름으로 건축했다. 이후 예천권씨 문중에서 매입해 권오복의 학덕을 추모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여름이면 푸른 버드나무와 각양각색의 연꽃이 만발한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우아함의 극치를 달린다.

예천=권중신기자

<금당실 체험 프로그램>

금당실마을의 매력은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반상의 문화가 공존했던 마을의 특성을 살려 다양한 고택 민박과 농촌 체험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괴당 고택을 비롯해 김대기가옥, 유천초옥, 우천재, 초간정 등 마을 내 고택에서 한옥 숙박이 가능하다. 전통 문화를 활용한 이색 체험거리도 풍성하다. 금당실마을 홈페이지(http://ycgds.kr)와 전화(054-655-0225)로 예약 가능하다.

△금당꿀초만들기 = 신라시대 때 궁궐에서 고급 조명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밀랍초(금당꿀초)를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물 맑고 공기 좋은 허릿골 농장에서 벌집을 구경하고 벌집에서 나온 밀랍으로 인형 모양의 초를 만든다. 체험비는 1인당 1만원.

△탈만들기 = 돼지탈, 토끼탈, 호랑이탈, 도깨비탈 등 여덟 가지 탈 모형에 알록달록 색을 입혀 나만의 탈을 만드는 체험.

쉽게 따라할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 인기다. 1인당 체험비 5천원.

△연날리기 = 어린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른까지 모두가 만족하는 민속놀이도 즐겨보자. 전통방식으로 만든 연에 이루고 싶은 소원을 적고 하늘 높이 띄우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금당실마을에서 겨울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 체험비는 1만원.

△흑백사진인화체험 = 필름이 없던 1800년대 후반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내 모습을 찍어 직접 현상하고 인화해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진 한 장을 손에 넣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만큼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체험비 1만원.

예천=권중신기자 kwonjs@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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