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녹인 선율, 영혼 적신 감성…통기타, 인생을 노래하다
시대 녹인 선율, 영혼 적신 감성…통기타, 인생을 노래하다
  • 황인옥
  • 승인 2015.09.0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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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통기타 음악의 역사 되돌아보기

70,80년대 전성기

주 무대 중앙로…업소서 오디션

대구서 두 번의 부활

90년대 팔공산 통기타 라이브 붐

카페 60여곳 가수 100여명 활동

2000년대 수성못서 서울로 확산

통기타 가수 설 무대 많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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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배재혁, 진금염, 김나현, 정해구
케이블 방송 Mnet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 K 무대에서 통기타를 튕기며 열창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시청자들의 잠자던 아나로그적 세포가 깨어나 아침을 맞았다.

뒤이어 지상파 예능프로에서도 세시봉 1세대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해 통기타 음악의 순수 미학을 부각하며 통기타 음악의 부활을 주도했다. 이들의 여파로 최근 통기타 세대인 중년은 물론이고 젊은 세대까지 통기타 감성에 열광하며 통기타 배우기 열풍을 만들었다.

하지만 슈퍼스타 K 이전에 통기타 음악의 부활을 먼저 이끌었던 지역이 대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2000년대 초반, 수성못 주변을 중심으로 7080 라이브 카페가 우후죽순 생겨나며, 대구 통기타 음악의 부활을 견인했다. 사실 대구 통기타 음악의 부활은 그 이전인 90년대에도 급물살을 탔었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7080 전원 카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통기타 문화가 재등장한 것이다. 부활이라는 단어 속에는 중흥기가 전제된다.

그렇다면 대구 통기타 음악의 중흥기는 언제였을까. 이 질문에는 이견 없이 7,80년대를 꼽을 수 있다.

이 시기 동성로를 중심으로 통기타 1세대 가수들이 대구 통기타 음악의 꽃을 피웠다. 클래식음악, 오페라, 뮤지컬, 현대미술 등에서 대구문화예술의 저력은 다양한 통계와 역사적 사실이 인정하고 있지만, 대구가 역시 서울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통기타 음악의 중흥과 부활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에 대구 지역에서 통기타 음악의 지류를 이어가고 있는 통기타 가수들을 최근 만나 대구 통기타 음악의 과거와 현재를 더듬어보고 미래를 전망해 보았다.

인터뷰에는 50대 대표 정해구(52·이하 정), 40대 배재혁(44·이하 배), 30대 김나현(31·이하 김) 등의 전·현직 통기타 가수와 통기타 동호회 회원인 진금염(48·이하 진) 등이 참가했다. 통기타 가수 1세대인 정 씨는 현재 달서구 상인동에서 오비스 케빈 (OB’s Cabin)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자신의 카페에서 간간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2세대인 배 씨는 최근 봉산문화회관에서 단독 콘서트를 전석 매진으로 이끌며 통기타 음악 가수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3세대에 해당하는 김씨 또한 20살에 음악을 시작해 라이브 카페에서 10여년 동안 통기타 음악과 발라드 등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대구 통기타 음악의 원류를 이어온 세 명의 세대별 통기타 가수들과 통기타 동회회 회원을 한 자리에 모으고 보니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질문을 던지면 즉답으로 대구 통기타 음악사를 펼쳐내며 행복감과 안타까운 감정을 동시에 쏟아냈다. 우선 대구 통기타 음악을 논하기에 앞서 통기타 음악에 대한 정의부터 따져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첫 질문으로 던졌다. 4명의 인터뷰이 중에서 7,80년대를 풍미했던 가장 연장자인 정해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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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가수 정해구씨의 공연 모습
“통기타 음악은 통기타와 목소리라는 가장 순수한 조합으로 삶과 인생을 노래하던 음악입니다. 포크 음악과 팝송, 록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낭만과 시대에 대한 저항을 노래로 표현했죠. 단순함의 미학이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뿜어내는 내공과 깊이는 결코 가볍지 않았어요.”

그의 말을 받아 7,80년대 통기타 음악이 대구에서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한 질문을 재차 던지자 그가 추억을 더듬으며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통기타 음악의 명멸을 함께 해 온 그에게 통기타 음악은 그의 청춘 시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기억이자 지금은 추억으로만 자족해야 하는 애잔한 첫사랑 같은 존재다. 그는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면 기운이 난다는 말을 꺼내며 70, 80년대로 기억을 더듬어 들어갔다.

그에 따르면 7,80년대 대구 통기타 문화의 중심 무대는 중앙로 일대를 일컫는 중앙통이었다. 대구 통기타 음악의 메카였던 ‘코러스’를 비롯해 코리아 음악 감상실 등의 통기타 공연이 포함된 음악감상실이 성행했다. 중앙통 외에도 대학가의 음악감상실이 가세했다.

“당시에는 업소에서 오디션을 봐서 노래하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별이 명확했어요. 오디션 결과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고 급료가 형성됐죠. 주 무대는 중앙통이었어요. 코러스, 신문고, 마음과 마음, 무랑루즈, 환타지아, 꼬방꼬방 등 어림잡아 20여 곳의 다양한 장르의 업소가 성업하고, 50여명의 통기타 가수들이 그 업소를 기반으로 통기타 음악을 꽃 피웠어요,”(정)

당시 활동하던 가수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화전동 코리아백화점에 있던 코리아 음악감상실 등에서 노래하다 상경해 들국화를 결성한 전인권과 혼성듀엣 ‘한마음’의 가슴앓이와 갯바위 등의 히트곡을 냈던 강영철, 비지스 노래로 팬심을 사로잡았던 손대권과 강병성, 로보 등 모던 팝송을 기막히게 불렀던 박영규(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등을 연출했던 KBS PD), 장철웅 등이 그들이다. 대구에서 첫 통기타 듀엣으로 활동한 ‘콩 심는 아이들(주진과 김지훈)’과 ‘하사와 병장’ 등도 손꼽힌다.

74년에 대구의 첫 통기타 가수 모임인 ‘YDFC(영대구 포크싱어 클럽)’가 결성되고. 이에 힘입어 대구역전 미문화공보원 2층에서 창단 기념 콘서트를 연 것을 시작으로, 대구 지역 대학 캠퍼스에 통기타 동아리아 생겨난 것도 대구 통기타 부흥의 밑거름이 됐다.

“당시 사람들은 감성이 풍부했어요. 낭만과 저항을 담은 순수한 통기타 음악이 라이브 무대에서 신청곡을 통해 가수와 관객을 하나로 이어주었죠.”(정)

7,80년대가 지나고 X-세대가 등장하고 댄스음악과 발라드가 등장하면서 음악감상실 등이 하나 둘씩 문을 닫게 되면서, 대구 통기타 음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곧 통기타 라이브 붐이 팔공산을 중심으로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려낸다. 96년 팔공산 송림사못 옆 ‘시인과 농부’가 문을 열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팔공산에 무려 60여개 통기타 라이브 카페가 등장하게 된다. 당시 활동한 통기타 가수만 해도 100여명에 이른다. 팔공산을 기반으로 한 통기타 음악의 부활은 이후 10년 동안 지속됐다. 배재혁은 카페 ‘시인과 농부’의 원년 멤버로, 그곳에서 1년간 라이브 무대를 꾸몄다.

“당시 팔공산에 통기타 라이브 카페가 생긴 순서대로 지도를 그려봤더니 60여 곳이나 되었어요. 미사리보다 팔공산이 먼저였죠. ‘시인과 농부’ 주말 하루 매출액이 5백 만 원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어요. 인구 비례 전국 최대 수준이었죠. 팔공산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이 미사리에 통기타 라이브 카페가 생기면서 활동 무대를 옮긴 경우도 꽤 많았어요. 대구가 90년대 후반 서울보다 먼저 통기타 음악의 부활을 이끌었어요.”(배)

2000년대 초 팔공산 통기타 라이브가 시들해지자 수성못변 OB캠프와 올드팝스를 중심으로 7080 라이브가 대구에서 두 번째로 부활의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이 시기의 7080 음악의 부활은 통기타 음악과 사뭇 달랐다. 밴드와 그룹사운드가 중심이 된 것. 이는 시대적 변화와 관계됐다. 노래방이 성업하면서 노래 반주기가 라이브 연주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대구에서의 7080 음악의 부활은 2004년 11월 첫 전파를 탄 배철수의 ‘콘서트 7080’보다 앞섰으며, 대구 수성못변의 7080 음악의 부활이 역으로 서울, 경기로의 확산을 이끌 만큼 시대적인 감성을 앞서갔다. 하지만 이 시기 7080 음악의 부활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시들해졌다.

“반주기가 등장하면서 음악적인 수준이 많이 떨어졌어요. 경기가 좋지 않은 탓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야 했기 때문에 악기를 다루며 노래하는 깊이 있는 가수보다 그저 반주기에 맞춰 가볍게 노래하는 분위기로 흘렀죠. 그러면서 통기타 가수들이 설 자리를 잃었고, 1년도 못가 수성못변 7080 음악의 부활도 사그라들었어요.”(배)

라이브 무대가 무너지는 대목으로 접어들자 정해구도 한마디를 얹었다. 그는 “노래방 문화가 성업하고 반주기가 손쉬운 무대를 제공하면서 가수보다 손님들이 노래하는 문화가 생겨났다”며 “그 여파로 가수들의 라이브 무대가 없어졌다”고 분석했다.

슈퍼스타 K가 시즌 7까지 롱런하면서 통기타 음악도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젊은이들의 거리인 홍대에 인디뮤지션들도 넘쳐나고 홍대 앞 라이브카페 ‘언플러그드’에는 기타를 배우려는 젊은이들로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통기타 음악은 21세기 현재의 색깔을 입고 있다. 통기타와 다양한 악기들이 변주하며 현대인의 감성으로 새옷을 입고 있는 것. 대구 역시 버스킹을 중심으로 현대화된 통기타 음악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0대 초반부터 노래를 시작해 10여 년 동안 대구의 한 카페에서 라이브로 노래해온 김나현은 현대화된 통기타 음악 세대다. 그녀 역시 통기타, 록,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시대적 변화에 흡수되고 있다.

“지금의 버스킹 세대는 아날로그가 아닌 어쿠스틱 느낌의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화려한 노래를 좋아하고 그런 음악들을 자주 불렀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7080 음악의 감성으로 흘러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음악을 공부하게 되고, 더 많이 부르고 있죠.”(김)

통기타 음악이 침체로 접어들면서 동호회의 역할이 통기타 음악의 재점화를 이끌 중요한 기반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7월 배재혁 콘서트에 봉산문화회관 가온홀의 423석을 만석으로 채울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이 통기타 음악의 저변이 되고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를 소비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 진금염은 동호회 ‘7080다시부르기, 통기타 울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의견이 궁금했다.

“학창시절 통기타 음악을 좋아하다 성인이 되면서 살기 바빠 멀어졌죠. 40살이 넘어가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자 통기타 동호회에 가입하고 통기타와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죠. 저희 동회회가 당시의 음악을 직접 배우기도 하고, 통기타 가수의 무대를 찾으며 통기타 음악의 부활에 역할을 보태려 하고 있어요. 회원들 중에는 가끔 프로 무대에 서기도 하면서, 젊은 시절의 못다 이룬 통기타 가수에 대한 꿈을 느껴보기도 하지요.”(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통기타 음악의 재점화 가능성으로 모아졌다. 이는 모두의 염원이 담겨있는 바람이기도 했다. 맏형인 정해구가 “문화는 10~15년 주기로 바뀌는데 최근에는 주기가 없어졌다”며 비관적인 진단을 하면서도 “좋은 음악을 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영혼을 울리는 수준 높은 음악이 나올 것”이라고 낙관했다.

배재혁은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지난 7월에 대구포크페스티벌이 10여 만명의 청중을 끌어들이며 선전했다”며 “대구에서 그런 큰 포크 무대가 많이 생기고 대구 포크 가수들이 참여하게 되면 포크 붐이 다시 일어나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될 것”이라며 대구에 통기타 가수가 설 수 있는 좋은 무대의 확대를 지적했다.

막내인 김나현은 통기타 음악의 강점을 언급하며 통기타 음악의 가능성을 피력했다. “모든 음악의 종착역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겠어요? 우리 시대가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지 말고, 순수성도 함께 추구해 아나로그적 감동이 있는 음악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진금염은 통기타 동호회 회원들의 역할을 언급하며 통기타 음악의 부활을 점쳤다. “똑같은 형태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지만, 우리가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명맥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같은 아마추어와 프로 통기타 가수들의 교류 확대가 더 활성화 되어야 겠지요.”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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