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서·화로 민족혼 일깨우는 이 시대 선비
시·서·화로 민족혼 일깨우는 이 시대 선비
  • 황인옥
  • 승인 2016.06.2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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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병 도 화가·시조시인

서양화서 한국화로 ‘운명적 전향’

유산 민경갑 화백과 만남 계기

한국적 정체성 표현 열망 커져

묵직한 필선 통해 민족혼 형상화

한국시조의 부활을 꿈꾸며

고교 때부터 시·소설 등 문학 활동

1976년 신춘문예 당선 시조시인 첫발

청도 대표 문화 자산화 아낌없는 노력

예술인의 산실 ‘목원예원’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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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이자 시조시인인 민병도는 “예술가는 시대를 진단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의 목적성이다. 내게 있어 문학은 시대를 진단하는 도구이며, 그림은 치유의 장”이라고 밝혔다. 윤관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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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언예원 전경.
조선시대에는 시·서·화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3절의 상태를 시화일치 또는 서화일치라고 칭하며 존경해마지 않았다. 시화일치의 경지라야 명망 있는 선비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이들에게 시·서·화는 학문과 철학을 풀어내는 세련된 도구였다.

민병도. 그는 시·서·화를 아우르는 21세기적 선비상에 근접한다. 대구미술협회장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를 지내고 24번의 개인전을 열었으니, 한국화가로서도 일가를 이뤘다. 시조집 16권, 시집 2권, 시화집 2권, 평론집 3권, 수필집 2권을 출간하고 제20회 중앙시조대상, 제45회 한국 문학상 수상 등 10개의 걸출한 문학상을 수상했으니, 시조시인으로서의 역량도 상당하다. 47년을 시조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가 이룬 그림과 문학의 결실을 무게로 달면 에누리 없는 50대 50이 나온다. 학문과 철학의 경지를 시화일치로 풀어내고 있으니, 이만하면 조선시대 선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목언예원(木言藝苑)에 스스로를 유배시키다

지난달 27일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목언예원(木言藝苑)을 찾았다. 최근 목언예원을 재건축하고 새롭게 단장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한다고 해서 겸사겸사 들렀다.

목언예원은 2천314평방미터(㎡·700평) 규모가 개인작업실 수준을 넘어선다. 1천090평방미터(㎡·330평)에서 시작해 지금의 규모로 확장됐다. 공간은 시조와 한국화를 창작하는 작업실인 남강화실, 전시공간인 나무갤러리, 손님을 맞는 불이산방(不二山房), 그리고 차실 관수정(觀水亭) 등으로 이뤄진 2층짜리 건물과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소박한 정원으로 구성된다. 목언예원을 휘감아도는 금천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로운 정취를 자아낸다.

목언예원 입구에 있는 ‘시와 예술을 위한 공간’이라는 설명석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의 작업실은 여느 화가와 달랐다. 풍광도 예사롭지 않지만 내용면에서 그랬다. 그림과 시를 짓는 두 개의 작업실이 나란히 연결돼 있는 것. 첫 번째 작업실에는 이젤과 물감 그리고 그림이 흩어져 있으며, 옆 공간에는 4면에 빼곡하게 채운 책과 그 중앙을 책상이 버티고 있었다.

민병도는 화가와 시조시인을 겸한다. 그는 이 두 작업실을 오가며 때로는 화가로, 때로는 시조시인으로 창작 열정을 불사른다. 두 분야를 겸한다고 해서 ‘무늬 정도만 낼 것’이라는 선입견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거듭 말하지만 그는 화가로서도, 시조시인으로서도 상당한 경지를 자랑한다.

예술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이처럼 부럽기는 처음이었다. 모래알처럼 많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한 분야에서만 명성을 얻기도 어려운데, 그는 그림과 시조에서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형성해왔다. 그러면서도 미술과 시조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도 동분서주해 긁직한 결실들도 일궈냈다. 리더로서의 자질도 십분 보여준 것. 이만하면 부러운 것은 당연지사다.

- 목언예원 앞 풍경이 한국화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한국화가와 시조시인의 영감을 자극하는데 더 없이 좋은 공간이 아닌가?

“1999년 터를 잡았다. 청도가 고향이기도 하지만, 목언예원 앞 병풍처럼 펼쳐진 수려한 풍광에 끌려 보자마자 마음을 정했다. 이 앞을 흐르는 강이 금천(錦川)이다. 그야말로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흐르고, 서슬 퍼른 적벽이 강줄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 목언예원이라는 이름에 담은 뜻은 무엇인가?

“나무의 말을 바르게 들어서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 사람과 나무가 서로 존중하는 곳, 즉 ‘나무의 말을 듣는 곳’이다. 진리를 전하고 진리를 깨닫는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었다.”

- 최근에 재건축해서 첫 개인전을 시작했다. 목언예원이 어떤 공간이 되길 바라나?

“문화선진국에는 작은 소도시나 시골에도 박물관이나 미술관, 갤러리가 있다. 이런 공간들이 지역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지역문화를 꽃피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도시에도 그런 공간들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보니 면소재지 같은 시골에는 엄두도 못낸다.”

-목언예원은 개인 공간이다.

“지방자치단체가 못하면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 의도가 그랬기 때문에 재건축 할 때도 문인들을 위한 공간을 4개나 만들었고, 갤러리도 확장했다. 이 공간이 예술가와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마음은 처음 이곳에 올때와 변함이 없다.”

- 지역사회 예술의 구심점이 되기 위한 더 큰 계획이 있나?

“목언예원 인근에 5천619평방미터(㎡·1천700평)의 땅을 확보해 놓은 상태다. 그 땅에는 작은 예술촌을 만들어 장르별 예술가들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싶다.”

- 갤러리가 훌륭하다.

“내 작품도 많지만, 소장하고 있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도 500~600점 정도 된다. 갤러리는 평소에는 상설전으로 내 작품과 소장 작품전을 열면서 간간이 다른 화가들의 전시도 열 계획이다.”

◇한국인의 정신을 담는 한국화에 매진

한국화가 민병도는 고등학교 시기에 그림과 문학을 동시에 시작했다. 본격적인 그림은 영남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시작됐다. 강렬한 발묵(먹물이 번지어 퍼지게 하는 산수화법)으로 한국화의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한국화의 대가 유산 민경갑 화백을 만나면서 한국화로 전환했다.

- 한국화로 전환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나는 그림과 시조를 통해 민족혼을 표현한다. 우리가 하는 서양미술은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하는데 역부족이고, 우리의 창조정신을 담아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한국화에서 민병도라는 화가가 본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2천년 동안 검증된 한지와 필력이 있다. 도화지는 딱딱하지만 한지는 흡수력이 강하다. 또 우리나라는 예부터 미적 감수성이 풍부했다. 나는 한국화의 이러한 장점들을 통해 우리정신의 요체를 표현할 수 있다고 봤다.”

- 처음에는 실경산수화를 그렸다. 그리고 구상으로 넘어왔다. 계기가 있었나?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우리가 그리는 그림은 그런 것을 담아내지 못한다.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에 ‘참 나’와 ‘근본 원리’가 나온다. 나 또한 변화하지 않는 근본 원리를 그릴 때라야 진짜 예술이라는 생각에 이르면서 구상으로 넘어왔다.”

민병도는 ‘산’과 ‘들’을 주로 그린다. 10여 년 전부터 실경 산수화에서 산과 들의 뼈대에 조형성을 집중하는 구상으로 변화했다. 그는 “2~3천 년 전 벽화를 보면 단순하게 뼈대만 그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이미지가 강렬하게 전해진다. 진리는 그런 것”이라며 “특히 나는 민족혼을 그린다. 혼의 골격을 찾아야 한다. 묵직한 필선은 그것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 민병도가 생각하는 예술은 정신이 핵심인가?

“재료의 기법, 테크닉만 있으면 기술이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술은 결국 정신의 행위이며, 예술이 지향하는 목표는 감동이다. 감동은 정신에서 나온다. 시대정신을 놓쳐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 민족혼의 대표 형상이 산인가?

“한국 산의 골격과 민족혼은 닮아있다. 나는 산을 통해 우리의 정신을 담아낸다.”

- 민병도가 보는 한국인의 민족혼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외세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남의 나라를 침략한 역사는 없다. 단지 외세의 침략에 강력하게 저항해 우리를 지켰을 뿐이다. 우리는 공격적인 포크나 나이프 대신 둥그런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그 수저 하나에도 담겨있는 우리의 창조정신, 도전정신이 우리의 민족혼, 정신이라고 본다.”

- 물질만능 시대에 민족정신은 훼손됐다.

“현대인은 우리의 저항정신, 도전정신이 사라지고 공격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본래의 우리 정신을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 일을 교육과 예술이 해야 한다.”

- 화풍의 변화도 화가로서의 저항정신, 도전정신이라고 보아도 되나?

“바로 그렇다. 예술가는 새로운 길에 대한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극복하고 미지의 조형성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가의 사명이자 숙명이다.”

- 조선시대 선비는 학문이나 철학의 경지를 시·서·화로 표현했다. 21세기 선비 민병도 그림의 바탕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불교 공부를 오랫동안 했다. 종교로써가 아닌 철학으로 불교에 접근했다. 특히 ‘원효사상’에 심취했다. 노자의 ‘도덕경’과 미술사 공부도 팠다. 그런 동양의 철학과 사상들이 내 그림과 시조의 바탕이 됐다.”

- 화가 민병도의 도전 정신은 여전히 계속되리라고 보는데…

“지금은 구상에서 추상 언저리까지 왔지만, 완전한 추상은 아니다. 지금은 현재의 작업이 재미있다. 어느 정도 원숙해지면 좀 더 깊어진 추상에 매진할 것이다. 한국화가로 궁극적인 바람은 새로운 한국미술의 조형성을 만드는 것이다.”

◇청도가 시조시의 본고장이 되는데 역할 보태고파…

“형 대신 징용 갔을 그 산길에 곱던 참꽃/올해도 어김없이 절며오네/남아서 부끄러운 사람, 한 명 한 명 안부를 묻네” 민병도의 시조시 ‘참꽃’이다. 장손 대신 징용에 가 꽃처럼 산화한 젊은 혼에 대한 헌시다. 그림도 그랬듯 그의 시조 또한 민족혼이 주제다.

문인 민병도는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40여년 만인 2013년에는 한국시와 시조시인 100명의 시집을 모은 ‘한국대표명시선100’을 출간하며 국내를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 명시선에 선정된 100인에는 한용운 김소월 정지용 윤동주 박목월 김영랑 이호우 서정주 천상병 신경림 고은 등 현대시 초기부터 정호승 안도현 김용택 도종환 민병도 등 1990년대까지 자유시와 현대시조의 대표시인들이 포함돼 있다.

- 시조는 언제부터 썼나?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는 시와 소설을 쓰고 수필을 썼다. 시조시인 이영도 선생님을 만나면서 시조로 정착했다. 73년부터 75년까지 배웠는데 내가 이영도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다.”

- 시조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

“시조에는 뛰어난 역사성이 있다. 시조는 고려시대 이후 700년 넘게 지속되면서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해왔다. 이것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시조의 부활은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리는 것과 맥락을 함께 한다.”

- 문학이든 그림이든 우리는 우리 것을 너무 빨리 버렸다. 다른 나라는 어떤가.

“일본만 하더라도 일본의 전통시인 ‘하이쿠’를 현대에도 잘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130여 개국에서 가르칠 만큼 세계적으로 보급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정신을 시조를 통해 복원해야 한다.”

그는 현재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이호우·이영도문학기념회 회장, 청도우리저인문화재단 이사, (사)국제시조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시조 발전과시조의 고장 청도를 만드는데 노력해 왔다.

- 시조를 청도를 대표하는 문화자산으로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7월1일에 레일바이크 공원인 <유호공원>을 개장한다. 새마을기념관에서 시조시인 유호 선생 생가까지 왕복 5Km 거리다. 그 거리에 26개의 시조비를 건립하고 <청도시조공원>을 조성하는데 역할을 했다.”

- 10월에 청도국제시조대회를 개최한다는데.

“이영도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시조대회를 열 계획을 세우고 청도군과 추진하면서 경상북도에서도 지원해 주겠다는 의사를 밝혀 규모가 커졌다. 우리나라 시조시인은 물론이고 일본 하이쿠와 중국 한시, 연변의 조선족 시조 시인들이 청도에 온다. 국제적인 규모의 시조대회가 될 것이다.”

- 청도의 대표 예술로 시조가 자리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1차적으로는 한자문화권인 동양 정형시인들이 중심이 되지만 장기적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태리 등 정형시를 쓰는 서양도 포함될 것이다.”

- 국립시조원 건립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국립시조원 계획은 시조를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 번역하고 새로운 창작의 동기를 확보하며 장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시급한 국가적 과제다. 지금까지 시조에 쏟은 열정으로 보아 청도가 최적지라고 여겨 발상했다.”

- 민병도에게 시조는 어떤 의미인가?

“시대를 진단하고 내리는 처방전이며 침 같은 것이다. 시조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그렇다. 세상이 아플 때 아픈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을 낫게 하는 처방전을 내리고 침을 놓는다. 형식만 다를 뿐이다.”

민병도의 예술에서 ‘민족혼’ 못지않은 화두는 ‘치유’다. 작가정신을 표현하는데 있어 자연을 예술의 소재로 삼는 것도 강렬한 대비의 오방색을 화폭에 담는 이유도 ‘치유’에 대한 염원 때문이다.

“예술가는 시대를 진단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의 목적성이다. 내게 있어 문학은 시대를 진단하는 도구이며, 그림은 치유의 장이다. 내 예술의 지향점도 그렇듯 목언예원도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소쇄원이나 식영정같은 영남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만들어 예술과 정신이 쉬어가는 치유의 공간으로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 싶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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