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마다 서린 추억…감나무 숲길엔 정겨움이 ‘주렁주렁’
골목마다 서린 추억…감나무 숲길엔 정겨움이 ‘주렁주렁’
  • 정민지
  • 승인 2016.09.0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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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다로리 마을
고려 19개 역 관장하던 성현역
1920년대 경부선 남성현역 등
수백년간 마을 교통 중심 형성
외지인 반기는 ‘역촌 정서’ 흘러
푸근한 인심에 젊은 세대 많아
골목엔 주민 삶 녹인 벽화 가득
청도다도리마을
경북 청도군 화양읍 다로리 마을은 100여년 전부터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남성현’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다. 전국 유일의 감나무 숲길은 가을이면 바알간 감이 탐스럽게 열려 정취를 더한다.

하늘·감잎·황소·감 색(色)을 닮은 가슴 높이의 담장에는 두어줄 짧은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인생은 알 수 없다. 다만 고생 속에서 작은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싸우지 마라. 한 발짝씩만 물러나서 서로 바라보라’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 나누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잠언같은 글귀는 수십 년 이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이 평소 살면서 되새기는 말들이다. 어느 집 담벼락도 똑같지 않았지만 선한 인상을 주는 점에서 모두 닮았다.

다로리 마을의 벽화는 평범한 주민들의 특별함이 녹아 있었다. 경북 청도군 화양읍에 위치한 다로리(茶路里)는 경산과 경계를 이루는 성현산의 남쪽에 있어 ‘남성현’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로리를 지나는 기차역 이름이 ‘남성현’ 역인 이유다. 주민들은 ‘남셰인’ 또는 ‘셰인’이라고 편하게 발음하는 편이다.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좁은 골짜기에 들어선 다로리는 임야가 90%가 넘는다. 산마다 감나무를 많이 심었다. 다로리 마을 이명희 이장은 “해발 300m에 위치한 우리 마을은 그 자체로 청정지역이지만 특히 비옥하고 물빠짐이 좋은 토양”이라며 “나무만 심어 놓으면 열매가 열린다”고 자랑했다.

다로리의 자연부락은 다방동, 노상동, 노하동으로 나뉜다. 다방동(多防洞)은 중심마을로 담 안쪽의 마을이라 담장이 많아 붙인 이름이라는 설과, 과거 길가에 ‘다방’이라 불리는 주막 비슷한 곳이 있어 이름이 붙여졌다는 주민 이야기도 전해진다. 노상동(路上洞) 과 노하동(路下洞)은 기차역을 중심으로 길 아래와 윗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다로리 마을을 설명할 때 ‘남성현’역을 빼놓을 수 없다. 하루에 4번 경부선 무궁화호가 남성현역에 정차한다. 지금은 주민 10여명이 이용하는 작은 역이지만 한때 3분마다 기차 소리가 들릴 정도로 번성했다.

남성현역은 무려 100여년 전 문을 열었다. 1919년 8월 신호소로 영업을 시작해 1923년 5월 보통 역으로 승격됐다. 도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 남성현역은 이 일대 교통의 중심이었다. 역 앞 도로에는 파출지서, 양조장, 상점, 음식점 등이 들어서는 등 역세권이 형성됐다. 마을 주민들 기억에 따르면 잠시 기차가 정차할 때 양조장에서 급히 술을 가져다 팔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마을에는 명절때만 문을 여는 떡방앗간 하나, 슈퍼 하나, 식당 하나가 가게의 전부다. 하나뿐이라 더 정겨운 곳들이다.

사실 다로리는 역촌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철마가 생기기 훨씬 전인 고려시대부터 다로리에 성현역(驛)이 있어 13∼19개의 역을 관장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세기에 발간된 성현도역지(省峴道驛誌)에 따르면 ‘성현의 설치는 아주 오래돼 고려와 조선 이전에 이미 설치됐으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역은 말을 준비하고 사람이나 말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을 말한다. 역촌의 정서가 남아있는 다로리 마을 사람들은 원주민과 외지인을 구분하는 배타성이 없다고 한다. 역에서 내리는 이들이 늘 반갑다.

‘청도’하면 ‘감’을 떠올리듯 다로리 주민들 삶에서도 감 농사를 빼놓을 수 없다. 매년 가을이면 발갛게 익은 감을 따느라 정작 지역에서 열리는 ‘청도반시축제’를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을 정도다. 특히 다로리에는 전국에서 유일한 감나무 숲길인 ‘청도 감꽃길’이 있다. 다로리에서 옆동네인 송금리 와인터널까지 이어진다. 윗길, 아랫길로 나눠진 감나무 숲길은 아늑하고 정감있어 걸어서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아쉬울 따름이다.

올해 다로리 마을은 벽화마을로 변화를 꾀했다. 예쁘기만 한, 그런 흔한 벽화는 아니다. 마을 주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글과 그림이 마을을 빼곡히 채우게 된 것.

닮은 듯 다른 254명 마을 주민이 각자 품고 있던 마음을 응축한 벽화는 어느 마을의 그것보다 아름다웠다.

머리에 장사 보따리를 인 채 큰 애는 손을 잡고 작은 애는 등에 업은 이영조 씨는 대구 번개시장까지 장사를 다녔다. 힘들었지만 그때가 그립다는 이 씨의 집에는 그 시절의 그림이 그려졌다. 한평생 일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딸의 집에는 노래 ‘찔레꽃’의 가사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가 새겨졌다.

농사일로 늘 바쁜 마을 주민들이 가장 좋았던 기억으로 꼽는 일도 벽화로 남겨졌다. 기찻소리를 배경으로 마을 하천에 모여 물고기를 잡아 추어탕을 함께 끓여 먹었던 추억이 그것이다. 어린 아이가 많은 다로리를 상징하는 캐릭터 ‘다롱이’도 벽 한 켠을 채웠다.

벽화사업을 진행한 조형진 별이사는집 대표는 “마을의 이야기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라며 “다로리 사람들의 희로애락,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벽화에 담고자 했는데 주민들이 마을을 열고 함께 해줘 이렇게 벽화마을로 탄생했다”고 말했다.

청도다로리마을4
올해 대통령직속지역발전위원회의 ‘신의 물방울’ 사업 일환으로 추진된 다로리 마을 벽화는 마을 주민들의 삶과 철학을 담은 글과 그림으로 채워졌다.

◇우리 마을은…

다로리 마을 이명희(58) 이장은 태어나서 한번도 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20년 직장 생활동안 청도 다도리에서 부산까지 출퇴근을 했다. 2년 임기의 이장을 두번째 하고 있다.

이명희 이장이 꼽는 다로리의 장점은 ‘주민’이었다. 주민들의 인생철학을 녹여낸 벽화에도 ‘선량한’ 기운이 가득했다.

“마을 주민들 인심이 좋아서인지 시골마을치고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10살 미만 아이들이 17명이나 됩니다.”

이 이장은 문화와 예술, 농업이 결합된 마을을 만들기 위한 구상에 열심이었다. 마을이 관광지로 바뀌면서 발생하는 주민간의 불화, 농촌의 참 모습과 동 떨어진 체험 등 여러 곳에서 목격한 폐단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것.

“올해 2차로 벽화가 완성되면 농가에서 직접 음식, 특산물, 기념품 등을 판매해볼까 해요. 주민의 삶이 반영된 곳에서 물건을 사면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도 달라지겠죠.”

마을 대부분이 감나무 농사를 짓고 있지만 수확할 노동력이 부족한 점에 착안, 도시민들에게 감나무를 분양해 농촌 체험과 수확의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할 계획도 있었다.

농촌 마을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잊지 않으려는 이명희 이장은 “다도리에서 한 템포 쉬어가는 삶을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권했다.

와인터널입구
다로리 마을 옆에는 청도 대표 관광지인 ‘와인 터널’이 있다. 감으로 만든 와인과 예술작품을 즐길 수 있다.

◇가볼 만한 곳

다로리의 음식점은 ‘우리명품한우식당’(청도군 화양읍 송금길 1·054-373-9200)이 유일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정성해 씨가 몇해 전 고향에 돌아와 차린 음식점이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창가 좌석에 앉아 바라보는 감나무 숲 풍경이 일품이다. 책을 좋아해 인문학 교실을 열고 싶은 정 씨의 식당에는 50여명이 모일 수 있는 세미나실도 마련돼있다.

인근 개구리 박물관 ‘청개구리 이야기’(화양읍 송금2길 10·054-371-4688)도 가볼 만 하다. 개구리엄마 심경자 씨가 25년 동안 수집하고 만든 5천여 점의 개구리가 전시돼 있다. 커피 대신 전통차를 판매한다.

다로리 지척에 ‘와인터널’(화양읍 송금길 100·054-371-1904)이 있다. 15분가량 감나무 숲길을 따라가도 좋고, 인근 전용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도 좋다.

1904년 만들어 사용하다 1960년대 폐쇄된 이 터널은 2006년 청도 감와인 저장소로 재탄생했다. 연중 15도 정도로 온도가 유지돼 여름철에는 천연 에어컨이 따로 없다. 총 1㎞ 터널의 절반 정도를 개발, 카페와 갤러리 등이 지루할 틈없이 들어차 있다.

청도감와인㈜ 이갑수 이사는 “터널 개발 전 황금박쥐 서식지였던 점을 살려 올해부터 황금박쥐 캐릭터를 만들었다”며 “단순히 와인저장고가 아닌 다양한 주제의 초대전과 공연을 기획,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

글=정민지·박효상기자

사진=전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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