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백자의 本鄕…잊혀진 반세기 영광을 되살리다
청송백자의 本鄕…잊혀진 반세기 영광을 되살리다
  • 남승렬
  • 승인 2016.09.0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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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법수 백자마을
민초 삶 간직한 조선 4대 民窯
‘도석’ 빻아 빚는 독특한 방식
가볍고 얇은 기벽으로 이름나
잇단 전쟁에 가마 대부분 소실
청송군, 법수골에 전수장 재현
공방·주막 등 옛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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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의 남쪽, 해발 717.5m의 무포산 자락에 자리잡은 청송군 부동면 법수 백자마을은 강원도 양구, 함경도 회령, 황해도 해주 자기와 더불어 ‘조선 4대 민요(民窯)’로 꼽히는 청송백자의 본향(本鄕)이다.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청송의 재를 몇 구비나 넘고 넘어 다다른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 산촌 마을이었다.

주왕산의 남쪽, 해발 717.5m의 무포산 자락에 자리잡은 청송군 부동면 신점리 법수골. ‘구름도 쉬어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천혜의 자연을 품은 오지 중의 오지다.

법수 백자마을은 강원도 양구, 함경도 회령, 황해도 해주 자기와 더불어 ‘조선 4대 민요(民窯)’로 꼽히는 청송백자의 본향(本鄕)이다. 민요란 조선시대 민간에서 가마로 구운 도자기를 이르는 것으로, 왕실이나 양반가의 그것이 아닌 탓에 서민의 삶과 닮았다.

특히 청송백자는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의 도자기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문경사기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한 서민생활도자기로 꼽히고 있다. 청송백자는 흙을 사용하는 다른 지역의 백자와는 달리 ‘도석’(陶石)이라는 돌을 빻아서 빚는 독특한 제작방식으로 인해 눈처럼 흰 설백색(雪白色)을 띠며 그릇의 두께가 얇고 가벼운 특징이 있다.

청송백자는 청송을 비롯한 경북 동·북부지역 민가에서 두루 사용됐다. 일제강점기 당시 지방 대부분의 사기들이 일본 ‘왜사기’의 물량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할 때도 청송백자는 일본으로 수출됐다고 하니 가히 그 명성을 알 듯하다.

하지만 명성 높던 청송백자의 운명은 화마와 포탄이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조선을 넘어 일본에까지 이름을 떨친 청송백자였지만, 한국전쟁은 설백(雪白)의 색깔을 가진 이 백자에게 크나큰 시련을 안겨줬다. 전쟁의 화마 속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는 대부분 소실됐고 청송백자를 빚던 사기장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원료와 인력 공급에 차질이 생긴 데다 엎친 데 덥친 격으로 대량 생산된 스테인리스 식기가 시장을 점령하면서 청송백자는 설자리를 점차 잃어갔다. 결국 1958년 신점리 법수골 청송백자를 굽던 가마의 불씨는 완전히 사그라졌다. 조선 민초의 삶에 녹아들며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청송백자의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2016년 가을의 초입에 찾은 청송 법수 백자마을은 500년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전통공방의 모습을 거짓말처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청송백자를 그냥 보내버리기엔 과거의 영광이 너무나 크다고 판단한 청송군이 백자 복원에 나서 2009년 법수골 일대에 공방과 전통가마, 주막 등을 그대로 재현시킨 청송백자 전수장을 조성한 것.

법수골 청송백자 전수장으로 들어가는 들머리 양쪽으로 우뚝 선 2개의 장승이 외지인들을 경계하는 섬뜩한 모습인가 했더니, 자세히 살펴보니 그 표정이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을 반기는 듯 정겹고 익살스럽다.

청송백자 전수관 주변은 백자의 주원료인 도석이 나는 법수광산이 병풍처럼 휘감고 있었다. 밀짚모자를 깊숙히 둘러쓴 형태를 한 움집형의 원형구조로 이뤄진 전통공방(사기움)은 원료의 분쇄에서 성형과 유약작업까지의 모든 공정이 한곳에서 진행되는 곳으로 청송지역만의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기움 옆의 커다란 가마도 눈길을 끈다. 청송지역에서는 굴과 같다고 해서 ‘사기굴’(전통가마)이라고 한다. 5개 칸으로 이뤄진 굴은 앞 칸에서부터 점차 커져 마지막 칸은 맨 앞 칸의 2~3배가량이 된다. 가마의 경사도는 40도 정도로 다른 지역 가마와 달리 매우 가파르다. 이는 청송백자의 원료인 도석의 내화력이 높아 짧은 시간에 가마 내부 온도를 높여도 기물이 파손되지 않는 장점을 이용한 청송 가마만의 특징이다.

청송백자 전수장에는 조선시대 등짐장수들이 그릇을 사러 왔을 때 하룻밤 묵었던 주막도 재현해 놓았다.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체험관도 조성돼 다양한 도예체험을 할 수도 있다.

가을의 법수골. 광산의 채굴 흔적과 전수장 곳곳에 보이는 사기 조각은 ‘느림의 미학’이 깃든 청송백자 500년의 영광을 그렇게 되살리고 있었다. 청송 부동면 신점리 법수골이 ‘청송백자마을’로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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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백자 마지막 사기장 고만경 옹
◇ 우리 마을은…

“청송백자는 흙 대신 돌을 빻아 만들기 때문에 다른 도자기보다 기벽이 매우 얇고 가벼운 데다 눈빛을 닮은 설백색이어서 일반 백자와는 또다른 매력을 품고 있어요. 내 비록 나이가 들어 숨도 가쁘고 청력도 약해졌지만 청송백자의 맥을 잇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청송백자의 최고의 기술자는 사기대장이다. 1958년 명맥이 끊긴 청송백자를 복원하기 위해 청송군은 과거 수년간 마지막 사기장을 수소문해 왔다. 입소문과 문헌 등을 통해 어렵사리 찾은 인물이 현재 법수골 청송백자 전수관을 지키고 있는 고만경옹(87)이다.

1929년생인 고옹은 15살이던 1944년부터 가마가 사라진 1958년까지 법수골에서 청춘을 바쳤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공업용 제품이 본격적으로 출현하면서 경쟁력이 약해져 더이상 사기장으로 일할 수 없게 된 그의 이후 삶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공방이 사라진 후 고옹은 대구와 포항 등지를 돌며 행상과 농막일 등을 하며 생활해 왔다. 고난과 좌절을 겪으면서 기능적으로, 인격적으로 완숙한 장인(匠人)의 경지란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스스로 깨달은 고옹은, 청송백자 마지막 사기대장이라는 타이틀을 뛰어넘어 이제는 현존는 최고의 사기장 반열에 올랐다. 긴 세월 돌아 돌아 청송백자 제작기술 전승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술을 가진 사기대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백발성성한 노인이 됐지만 고옹은 현재 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돼 제자 3명과 함께 법수골에서 청송백자의 전승·보전 활동에 마지막 투혼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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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백자 전수관에 조성된 전통공방(사기움) 내부 모습.

◇ 가볼만한 곳

청송하면 주왕산을 빼놓을 수 없다. 주왕산은 계절마다 욕심나는 산이다.

해발 720m로 높은 산에 속하진 않지만 기암절벽이 병풍을 이루고 물이 많고, 폭포도 많다. 발 떼기가 무섭게 새로운 비경이 나타나 여행자는 감탄을 멈출 수가 없는 곳이다.

돌이 많아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암산으로 꼽힌다. 원래 이름은 석병산이다. 이후 산이 깊고 험해 신라 말 당나라의 주왕이 은거했다고 해 주왕산이 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돌산이 험하다고는 하지만 여행자가 오르는 등산로 정도는 오히려 쉬운 편이다. 천천히 계곡을 보며 걷다 보면 물에 비치는 주봉의 반영이 신비롭다.

덕천마을도 청송의 명소다. 청송 심씨 일가가 모여 살던 곳으로 잘 보존된 고택이 압권이다. 그 가운데 송소고택, 송정고택, 찰방공종택의 어르신들이 고택을 돌보며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가장 큰 집인 송소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50호로 지정된 곳으로 영조 때 만석꾼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1880년에 지은 99칸 대저택이다. 이들은 9대에 걸쳐 250년 동안 만석의 부를 누리며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의 대부호로 명성을 떨쳤다.

규모도 규모지만 공간과 담, 창, 기둥과 지붕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한 것이 없다. 방마다 창으로 보이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이다. 탁자 위에 놓인 청송백자와 그 너머 창틀, 그 너머 작은 담장, 그 너머 초가 지붕이 단순하지만 겹겹이 다채롭다.

송정고택에서는 전통놀이 체험을 할 수 있다.

찰방공종택은 종갓집이다. 송소고택보다 규모는 작지만 종갓집 며느리의 알뜰한 살림살이가 그대로 묻어나는 공간이다.

항일의병기념관은 숨겨진 보석과도 같다. 청송은 한국에서 건국공로 독립운동 유공자로 포상이 추서된 의병 유공선열을 전국 시·군 중 가장 많이 배출한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항일의병기념관은 이들의 의병활동을 알리기 위해 구한말 화전등 전투가 이뤄진 터에 조성됐다.

기념관에는 전국 의병 1천927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이들의 이름, 훈격을 지역별로 명각한 명각대 등이 있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글=윤성균·남승렬기자

사진=전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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