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년 전 계획도시…마을구경 삼매경에 한나절 ‘훌쩍’
560년 전 계획도시…마을구경 삼매경에 한나절 ‘훌쩍’
  • 정민지
  • 승인 2016.09.19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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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월항면 한개마을

세종 때 진주목사 역임한 이우

영취산 자락 해발 40m 터잡고

후손 위한 이상향 계획 설계

안길·둘레길·공동우물 7곳 등

햇살 한 점·비 한 톨 낭비 않아

현대도 손꼽히는 건축美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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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마을은 600여년 전 풍수지리에 따라 계획적으로 조성돼 현재까지도 성산 이씨 집성촌을 유지한 가운데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백천을 따라 늘어선 참외 비닐하우스를 옆에 두고 달리던 차가 오른쪽으로 휘어질 듯 꺾였다. ‘한개마을’ 표지석 뒤로 황토색 길이 정갈했다. 입구에는 유명 관광지에서 볼 법한 안내소가 있었다. 안에서 책을 읽던 해설사는 코에 걸친 안경을 벗으며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천서당에 가려고 합니다.” “오른쪽 길을 따라 쭉 올라가세요. 중간에 갈림길에서도 오른쪽입니다.” 안내소에서 받은 한개마을 지도를 펼쳐 들고 차는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길의 끝에 19세기 초 건립된 한천서당이 있었다. 한적한 서당 담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심상찮았다. 연푸른색 도포에 갓을 쓴 어르신들이 강학공간인 월봉정 대청마루에 앉아 면학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공간 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서안 위 붉은 색 자양강장제가 아득해지는 정신을 차리게 했다. 이들은 9~10월 열린 ‘한개 민속마을 어르신 한학교실’ 수강생들이었다.

이곳에 성주한개마을보존회 사무실이 있었다. 이윤식 보존회장은 한학교실 가장 뒤에 앉아 있다 취재진을 반겼다. 다른 어르신들과 달리 연노란색 도포를 둘렀다.

“우리 마을은 성산(星山)이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따지자면 마을 주민들이 모두 22촌 안에 듭니다. 70호 가옥 중 10여 집은 비어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에 입향, 철저하게 계획에 따라 조성된 마을이다. 영취산 자락 해발 40~70m에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도록 집들이 지어졌다. 마을 안길과 둘레길, 공동우물 7곳, 수로도 모두 이우가 계획한 대로다. 오죽하면 뒷집에서 앞집을 보면 창문 위까지만 보이게 설계돼 모든 집에 햇빛이 골고루 듦은 물론 사생활 침해까지 방지해놨다.

이우의 자손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성산이씨 집성촌으로 560여 년을 이어온 한개마을은 월봉정을 비롯 첨경재, 서륜재, 일관정, 귀락정 등 재실도 여럿 있다.

이우의 6대손 월봉(月峯) 이정현의 외아들 이수성에게는 달천·달우·달한·달운 등 네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마을에 정착, 각각 백파(伯派)·중파(仲派)·숙파(叔派)·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됐다. 이들 자손 중 차남 이하의 자식들은 분가한 가운데 네 파의 자손들은 뒤섞여 살지 않고 같은 파에 속하는 집끼리 모여 살며 각각 재실을 만들어 조상을 모셨다.

보존회장을 대신해 한개마을 소개에 나선 이명식 한개마을 정비사업 단장은 “윗마을 서쪽은 크고 격식을 갖춘 한옥들이 많고 그밖의 공간에는 일반 민가들이 많다”며 “경북도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은 대부분 서쪽에 모여있다”고 설명했다.

이 단장과 한천서당 뒷문을 나와 마을 서쪽으로 향했다. 한주종택, 극와고택, 도동댁, 월곡댁, 응와종택, 하회댁, 교리댁, 첨경재, 진사댁, 삼봉서당 등 10개의 전통한옥이 경북도문화재로 지정돼 있었다. 한개마을 전체는 지난 2007년 민속마을로 지정됐다. 전국 7곳에 불과한 민속마을은 경북에만 안동하회, 경주양동, 성주한개, 영주무섬 등 4군데다.

토석담장이 인상적인 한개마을 고샅길을 따라 걷다 내부에 11동의 건축물을 품고 있어 압도적 규모를 자랑하는 한주종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선 말 성리학자 한주(寒洲) 이진상의 생가로 1767년 지어진 ‘주리세가’를 지나 한주종택의 별서인 ‘한주정사’를 마주했다.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지어진 정자는 영취산을 뒷마당으로 마을 앞 안산을 앞마당으로 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정자 동쪽 연못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연못을 거쳐 나가도록 설계돼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정자 옆 노송이 정취를 더 했다. 600여년 전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고 싶었던 조상의 뜻을 이어받은 듯 했다.

고택을 지나 시조 묘 7기를 모신 마을 서쪽 산으로 향했다.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낮은 언덕이었다. 변함없이 전통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에 부친 일인지, 또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한개마을은 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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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마을은…

이명식(75·사진) 한개마을 정비사업 단장은 한개마을 역사를 소개함에 있어 거침이 없었다. 고택 곳곳의 숨은 이야기와 마을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이 그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났다. 40년 넘게 대구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다. 역사고고학을 가르쳤던 이 단장 역시 성산 이씨 후손이다. 퇴임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던 그가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단장을 맡았다.

“한개마을은 하회나 양동처럼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두루두루 찾아오고 있다. 일부 양옥으로 바꾼 곳들도 있지만 이곳에 와야지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마을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수백년간 과거급제자부터 고위공무원, 기업인에 이르기까지 마을 출신 인물들을 배출한 한개마을은 과거 성주읍내보다 전기가 더 빨리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타성과 섞이기 싫어해 배타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일제때 경부선 철도가 성주를 지날 예정이었지만 우리 마을에서 목숨 걸고 반대해 성주 발전을 막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한개마을이 변화를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넓디 넓은 고택에 고령의 내외 혹은 할머니 혼자 남아있는 곳이 많아 관리에 애를 먹고 있다. 민속마을 지정으로 집 구조를 바꾸기도 힘들어져 주민들 사이에서는 “누가 민속마을 하고싶다고 했나”며 볼멘 소리도 나오는 실정이다.

마을의 자산을 활용해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마을로 거듭나는 사업이 진행중인 이유다.

그는 “한옥음악회와 야간 별빛기행을 열어 한개마을을 좀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하고 있다. 진사댁 등 고택 몇 군데에서 숙박과 체험을 할 수도 있다. 고즈넉한 농촌에서 먹고 자면서 하루 놀 수 있도록 시설을 확충해 우리 마을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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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정사.

◇ 가볼 만한 곳

한개마을을 꼼꼼히 둘러보려면 족히 2~3시간은 필요하다. 안내소에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해 미리 성주군청(054-930-6772~3)에 신청하면 설명과 함께 마을을 탐방할 수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가면 고택 숙박이 가능한 진사댁이 나온다. 이 길을 중심으로 월곡댁, 응와종택, 교리댁, 한주종택, 도동댁, 극와고택, 하회댁 등 경북도 민속문화재를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특이하게 북쪽으로 문을 낸 응와종택(북비고택)은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돈재 이석문의 집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으려다 삭탈관직 당한 돈재는 고향인 한개마을로 내려와 사랑채의 담을 헐어 북쪽에 문을 내고 사도세자를 추모하며 북쪽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북쪽으로 난 문이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1911년 지어져 20세기 초 목조건축을 살필 수 있는 월곡댁, 1760년에 세워져 마을에서 가장 오랜 내력을 지닌 교리댁 등도 기품있다.

고택들 사이 좁은 골목길은 ‘고샅길’이라고 부른다. 흙과 돌을 섞어 만든 토석담으로 고샅길의 정취가 더 살아난다.

한개마을 뒤 영취산 중턱에 있는 감응사도 가볼 만 하다. 신라 애장왕 때 건립한 사찰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애장왕의 아들이 눈이 아파 앞을 볼 수 없었는데 이곳의 약수로 왕자의 병을 낫게 했다는 것. 왕은 약수가 나는 곳을 옥류정이라 하고 승려 체징에게 절을 짓게 했다고 한다. 실제 옥류정은 사시사철 물이 많고 좋아 수도가 들어오기 전 한개마을 주민들도 자주 감응사에 올랐다고 한다.

글=추홍식·정민지기자

사진=전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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