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급제만 7명…봉황의 날개에 안긴 ‘명당 마을’
장원급제만 7명…봉황의 날개에 안긴 ‘명당 마을’
  • 정민지
  • 승인 2016.09.11 23: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미 선산읍 장원방마을

고려말부터 조선 영조대까지

과거급제 15명 ‘인재의 고장’

옛이름 대신 ‘장원방’ 통해

김종직·정지담·하위지 등

영남 사림 거두 대대로 배출

“비봉산 상서로운 기운 덕분”
/news/photo/first/201609/img_207964_1.jpg"구미/news/photo/first/201609/img_207964_1.jpg"
경북 구미시 선산읍 장원방마을은 ‘영남 인재 반’이 나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수백년 전부터 인재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다. 마을 주민들은 장원방 마을이 명당 중의 명당에 입지한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 사는 주민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말을 듣고 자랐다. 이중환 ‘택리지’의 구절로 특히 선산 ‘장원방(壯元房)’, 지금의 이문리, 노상리, 완전리 일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은 구미의 농촌마을에 불과하지만 이 곳은 수백년 전부터 조선 최고의 인재를 배출했던 남다른 역사가 있는 지역이다.

고려 말 우왕 때부터 조선조 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산에서는 총 36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됐다. 이 중 장원방 마을에서만 무려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 7명은 지금으로 치면 수능성적 전국 1등에 비견될 장원급제에 올랐다. 영봉리라는 이 곳의 옛 이름보다 ‘장원방’으로 더 알려진 이유다.

지금은 아쉽게도 이 일대에 장원방의 영광을 알려줄 문화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과거 사료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도 이문리 일대를 ‘서당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서당마을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던 선비들이 지나갔던 봉우리가 장원봉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최근 이문리에 서당공원을 세워 15명 과거 급제자의 이야기를 비석에 새겨 설치해놨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장원방은 문자 그대로 ‘장원이 나오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1400년대 전후로 마을에 한 명도 나오기 힘들다는 장원이 5명, 16세기 18세기에 각각 한 명이 더 배출됐다.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 역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들로 인재의 고장이라는 장원방의 자부심이 그럴 듯하다.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과거급제자는 길재의 제자 김치(金峙)다. 고려 창왕 때인 1388년 문과에 급제해 김해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원방에 살며 김숙자와 함께 후진양성에 힘썼다.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김숙자(金叔滋)의 두 아들 김종석(金宗碩)과 김종직(金宗直)도 장원방에서 공부해 급제했다. 김종직은 장원방을 공식 문헌에 처음 소개해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김치의 사위 정지담(鄭之澹)도 장원방 출신으로, 1416년 친시(親試) 을과(乙科)에 급제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서인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정초(鄭招)도 장원방의 인재다. 장원방의 최고 가문은 진주하씨(晉州河氏) 집안으로 하담(河澹)을 비롯해 그의 아들 하강지(河綱地), 하위지(河緯地), 하기지(河紀地)가 대를 이어 급제했다.

이처럼 많은 ‘인재’가 나온 배경으로 마을 주민들은 장원방 마을이 명당 중의 명당에 입지해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어느 마을이나 봉황이 모티브인 산 이름이 있지만 선산읍의 주산인 비봉산(飛鳳山)은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과 꼭 닮았다. 봉황의 날개에 장원방 마을이 쏙 들어가 있고, 봉황이 목을 내밀어 입으로 물고 있는 곳이 선산읍 소재지다.

비봉산에서 마주한 금오산을 바라보면 붓을 의미하는 한자어 필(筆)자 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선산읍지에 따르면 주산을 비봉산으로 정하면서 봉황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주변의 모든 산 이름과 절 이름을 거기에 맞춰 지었다고 한다. 봉황이 날아가면 상서로운 기운이 흩어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선산의 앞을 흐르는 감천 너머 물목마을 뒤 황산(皇山)은 수컷인 봉이 암컷인 황을 만나야 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고아읍 망장산(網障山)은 봉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물을 쳐놓는다는 뜻이고, 선산 서쪽 죽장(竹杖)리는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봉이 먹을 것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선산읍 동남쪽에는 온갖 꽃들과 새들이 있어 봉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화조(花鳥)리도 있다.

상상 속 불멸의 존재인 봉황의 품 안에 있어 선산 장원방에 인재가 많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계속 인재가 쏟아져 나오길 바라는 마을 주민들의 바람도 녹아 있는 듯하다.

김치가 선산 백성들을 위해 지었던 사당이나 하위지가 공부했던 독서당(讀書堂), 그가 낙향해 머물렀던 공북헌(拱北軒) 등 장원방 마을 출신 인재들의 생가나 공부했던 곳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안타까울 뿐이다. 하위지의 호를 딴 ‘단계천’도 복개돼 마을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마을에서 흔적을 그나마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하위지가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해 기념으로 심었다는 회화나무가 이문리에 남아 있다.

/news/photo/first/201609/img_207964_1.jpg"황상월
◇ 우리 마을은…

“지혜로운 분들이 많이 나온 마을에 사는 것 자체가 자부심이다.”

황상월(57·사진) 이문리 부녀회장은 과거 장원방 마을에 속하는 이문리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학교 선생님부터 마을 어르신들까지 모두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이라고 강조하는 통에 “우리 마을이 대단한 마을이구나” 여겼다고 한다.

가구수 960여개, 인구 2천500여명의 비교적 큰 마을인 탓에 이문리에는 마을회관이 아닌 ‘사무소’가 있다. 이장, 부녀회장, 사무장의 자리도 마련돼 있었다. 이곳 역시 마을의 발전을 위해 해방전후 구장을 역임했던 김형철 선생이 땅을 기부해 지어졌다. 수백년 전에만 인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마을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나오고 있었다.

최근 지역 주민들과 구미시가 힘을 합쳐 장원방을 재조명하고 서당공원 등 상징적인 장소를 만드는 것에 대해 주민들은 기대감이 컸다.

황 부녀회장은 “말로만 들어도 자랑스러웠는데 문화재가 남아 있었으면 더 생생하게 ‘장원방’을 알게 됐을 것 같다”며 “지금부터라도 고증을 거쳐 조금씩 복원해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news/photo/first/201609/img_207964_1.jpg"선산향교/news/photo/first/201609/img_207964_1.jpg"
선산향교.

◇ 가볼 만한 곳

장원방 마을이라 칭해졌던 선산읍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선산읍성의 남문 격인 ‘낙남루’가 복원돼 방문객을 반긴다. 고려 말 이득신 군수가 왜구의 노력질을 막기 위해 쌓은 토성인 선산읍성은 임진왜란 때 허물어져 1733년 조두수 선산부사가 돌로 다시 쌓았다. 구미시가 2001년 낙남루를 복원해 선산읍 관문인 1호광장 교차로에 건립했다.

최근 장원방 스토리텔링을 덧입혀 이문리에는 ‘서당공원’이 만들어졌다. 15명의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들의 간략한 이력이 새겨진 비석이 들어서 있다. 서당공원 인근에는 단계 하위지가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해 심은 것으로 알려진 회화나무가 있다.

선산읍에는 18세기에 건립된 ‘선산객사’가 있다. 지금은 내부가 텅 비었지만 당시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지방 수령이 부임할 때 대궐을 향해 예를 행했던 곳이다. 왕명으로 파견된 관원들이 숙소로 사용키도 했다.

선산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선초에 건립된 ‘선산향교’가 있다. 언덕 위 향교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선산읍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00년 선산부사 김용이 재건했다. 봄·가을에 석전재를 지낸다.

선산읍 앞을 가로질러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감천 끝자락에는 ‘금오서원’이 있다. 1570년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금오서원 왼편에는 봉수대와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녹색길’의 시작지점도 있다.

한편 매월 2일과 7일에는 선산읍에 오일장을 꼭 가봐야 한다. 이 인근에서 가장 큰 장으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아 멀리서도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다.

글=최규열·정민지기자

사진=전영호기자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