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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붓으로 사는 선비마을…한 집 건너 공직자 집안

기사전송 2016-09-28, 22: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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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경북도 마을이야기-의성 교촌마을
영조때 비안향교 옮겨오며 지명 얻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 모여 살아온 듯
평야·향교 덕분에 많은 공직자 배출
폐교 리모델링 등 농촌체험마을 선구자
도자기 굽기 등 꾸준히 프로그램 개발
“전국 많은 교촌마을 중 진짜 교촌마을은 우리”
교촌방앗간 인근 마을갤러리·아기자기한 벽화 눈길
우상윤 이장
의성
경북 의성군 교촌마을은 ‘비안향교’가 있어 교촌으로 불리게 됐다.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많은 교촌마을은 작은 농촌마을임에도 인적자원이 풍부하다.
‘교촌’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은 전국 각지에서 찾을 수 있다. 지역을 막론하고 ‘교촌’은 ‘향교’가 있는 마을에 붙는 이름이다. 엄밀히 말하면 향교가 들어선 후 그 마을이 교촌 혹은 교동이 된 셈이다. 지금으로 치면 학교에 해당하는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인재의 산실이었다.

의성 교촌마을3
조선시대 인근 비안현에서 교촌마을로 옮겨온 비안향교는 마을의 가장 위쪽에 위치해있다.
경북 의성군 안계면 교촌마을도 이런 연유로 지명이 정착된 마을 중 하나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교촌마을의 가장 위쪽에 ‘비안향교’가 있다. 조선 영조때 인근 비안현에 있던 비안향교가 이 마을로 옮겨오면서 ‘교촌’ 지명을 얻게 됐다.

지명유래는 그러하지만 교촌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오래됐다. 기록에 의하면 514년 신라 지증왕 5년에도 이 일대는 아척(阿尺·신라의 지방 관등)이 있는 취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교촌마을에 남아있는 ‘선돌’로 유추해보면, 이 곳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돌(입석)은 거대한 돌이 서 있는 유적으로 신석기~구석기시대 거석문화의 하나다.

자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초기 인류들은 방패가 되는 산과, 목을 축일 물, 너른 땅이 있는 살기 좋은 곳을 본능적으로 알아봤을 터다. 경북 3대 평야로 손꼽히는 의성 서부지역 안계 평야의 일부와 맞닿은 교촌은 산간 지역임에도 농사를 지을 넉넉한 땅이 있었다. 벼농사가 잘되고 맛이 좋아 예부터 쌀부자들이 많았다. 낙동강 제1지류인 위천이 실핏줄처럼 뻗어 땅 곳곳을 비옥하게 만들어준 덕이다.

평야와 향교는 경제적 여유와 교육열로 이어졌고, 교촌마을은 의성군에서도 유난히 공직자와 교육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마을로 이름나게 됐다.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은 동네”라는 우상윤 이장의 말처럼 교촌마을은 한 집 건너 공무원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적 자원이 풍부했다.

현재 주민 92명에 불과한 교촌마을의 중심에는 교촌농촌체험학교가 있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라는 특징을 강점으로 뒤바꾼 공간이다.

1990년대 이후 농촌 인구 유출에 따라 농어촌 마을 초등학교 폐교가 잇따르면서 지역의 사회문제가 됐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를 문화·예술체험공간으로 리모델링하는 사업이 추진돼, 현재 전국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초교가 새로운 공간으로 변신했다. 거점 공간의 탄생은 마을 전체를 체험·휴양마을로 바꾸는 효과를 낳았다.

농촌체험의 경우, 그 첫 걸음이 바로 의성 교촌마을에서 시작됐다. 농촌체험마을사업의 선구자인 셈이다.

교촌 초등학교는 1949년 9월 1일 개교했지만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교육 인구 부족으로 1994년 1천614명의 졸업생을 남기고 폐교됐다. 안계농업고등학교의 실습지 등으로 쓰이던 교촌초교는 이후 수년간 방치되면서 혐오시설로 변했다.

쇠락한 교정이 되살아난 것은 마을 주민들의 힘으로 2002년 농림부 녹색 농촌 체험 마을에 선정되면서부터다. 당시 주민 총회에서 폐교를 활용한 수련원 운영이 결정됐고 주민 56명은 1억8천만 원의 기금을 조성, 폐교 부지와 건물을 매입해 교촌 무지개 수련원을 개원했다. 이후 봄에는 모내기 여름에는 미꾸라지 잡기 가을에는 떡메치기 겨울에는 썰매타기 등 농촌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체험을 구상, 농촌 관광의 선례를 만들어왔다.

지금도 새롭게 체험마을을 꾸리는 지역 실무자들은 어김없이 교촌농촌체험학교를 찾고 있다. 전문 사무장 제도 등 운영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다.

과거 버스까지 대절해 연간 2천~3천 명의 관광객이 찾았던 체험학교의 인기는 식었지만 교촌마을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1999년부터 부녀회가 쌈짓돈을 모아 만든 ‘교촌방앗간’은 여전히 주민들의 힘으로 공동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마을 주민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모아 마을 벽을 활용, 갤러리를 꾸미기도 했다. 최근 가마를 설치, 주민들이 직접 도자기를 배워 굽는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우동추 체험학교 교장은 “최근에 만들어지는 체험마을에 비하면 교촌마을은 규모나 시설이 못 따라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체험마을의 원형이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교촌마을이 뿌리를 내린 덕분에 지금의 수많은 농촌체험마을이 결실을 얻고 있다는 의미다.

글=김병태·정민지기자
사진=전영호기자

<우상윤 의성교촌마을 이장>

의성 교촌마을 우상윤이장
"이래 봬도 제가 우리 마을 막내입니다.”

하얗게 센 머리에 깜박 속을 뻔했지만 우상윤(53) 이장은 단양우씨 집성촌인 교촌마을의 ‘막내’였다. 한때 초등학교 한 반에 60여명이나 들어찰 정도로 마을은 번성했지만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인 우 이장의 아들이 유일한 10대다. 현재 52가구 90여명이 살고 있다.

마을이 점점 나이 먹어가는 와중에시작된 체험마을사업은 이 작은 농촌마을에 일대 혁명을 불러왔다. 농촌마을도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가장 크다.

“마을 주민 절반 이상이 참여했고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면서 주민들 스스로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요. 사람이 빠져나가고 빈집이 늘면서 알게 모르게 농촌분위기가 침체됩니다. 그런데 농촌 그 자체로 관광 자원이 된다는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됐어요.”

나고 자라 한번도 마을을 벗어난 적 없다는 우 이장은 인적 자원을 교촌마을의 장점으로 꼽았다.

마을 회의를 해도 큰 소리를 내는 법 없이 대화로 갈등을 풀어가는 편인데다 적극적인 리더형 주민들이 있어 10년 넘게 체험학교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전국에 많은 교촌마을이 있지만 왜 ‘교촌’인지 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 와서 진짜 교촌마을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우 이장은 “참고로 교촌마을에 치킨은 없습니다”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가볼만한 곳>

교촌마을은 소로를 따라 걸으며 농촌마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국도 28호선에서 교촌마을로 꺾으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가지런히 정돈된 격자형 논이 펼쳐진다.

마을 초입에는 ‘동신각’이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 동신각에서 주민들은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신제를 지낸다. 동신각을 지나면 교촌농촌체험학교가 나오고 학교를 끼고 왼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비안향교’가 나온다. 비안향교는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창건돼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1610년 지금 있는 자리에 복원됐다. 대성전·명륜당·광풍루·정사청 등 9개 동으로 이뤄진 비안향교는 경북문화재자료 제263호로 지정됐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애초 비안면에 있던 이 향교는 이 일대를 관통하는 위천이 자주 범람해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대성전에 5성(聖)과 22현(賢)을 모시고 매년 봄에 제사를 지낸다.

의성 교촌마을6
교촌마을 주민들의 추억 속 사진으로 채워진 마을 갤러리가 눈길을 끈다.
교촌마을에는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교촌방앗간’이 있다. 체험학교에서 개인 주택인 큰 기왓집을 지나면 방앗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직접 만든 메밀묵과 두부가 유명했지만 운영 주민들이 고령화되면서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방앗간 주변에는 주민들의 사진으로 채워진 마을 갤러리와 아기자기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을에서 논으로 가는 농로를 따라가다보면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느티나무와 정자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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