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강’ 매년 백만명 이상 몰려
그곳에 몸 담그고 켜켜이 묵은 업 씻어
시신 떠내려 보내면 신의 축복 받아
화장터·운구행렬, 눈물보단 복 빌어
싸고 달콤한 요거트 음료 ‘라시’
멋모르고 많이 먹으면 설사 시달려
바라나시에는 나 같은 일반 여행객을 포함하여 매년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린다. 바로 그 성스런 갠지스, 그 영적인 강물을 만나기 위해서. 인도인들은 이 갠지스에서 몸을 씻어냄으로 인해 전생과 현생에 쌓인 묵은 업들을 모두 덜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힌두교도들은 사후에 시신을 갠지스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기도 한다고.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좀 마음이 동했었다. 스물셋 알바인생, 학점의 노예로 살아가던 그 하루하루가 참 지긋지긋 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왠지 갠지스에 몸을 풍덩 담그고 나면 뭔가 좀 달라질 것만 같았다. 신들이 머무른다는 강. 수천만의 영혼이 보살핀다는 그 영적인 물로 몸을 씻어내고 나면 나도 좀 하는 일 술술 잘 풀리고 인생사 좀 살맛나려나 싶어서.
허나, 나는 갠지스에 도착하자마자 그 생각을 단번에 접었다.
“으악! 뭐야 저거? 서,설마 저거 시체야?”
해가 떠오르던 아침,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갠지스를 건너는 배를 탔다가 정체불명의 어떤 물체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알 수 없는 무엇. 그걸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는데 그런 날 보며 사공은 껄껄 웃으며 ‘걱정마. 해치지 않아. 이미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인 걸’ 하며 달랬다. 뭐 어쨌거나 시체가 맞기는 맞다는 소리다. 그 얘길 듣고 나서 굳게 결심했다. ‘아, 갠지스 강물에 샤워를 하겠단 생각은 접는 게 좋겠어’하고.
시체가 타들어가는 동안 유족들은 그저 옆에서 신의 곁으로 떠나는 망자를 축복한다. 소리 내어 울지도, 땅을 치며 꺼이꺼이 슬퍼하지도 않는다. 시체가 타들어가며 팔 다리가 툭툭 끊겨 땔감 아래로 떨어져나가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저 망자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나는 실로 이것이 가장 놀라웠다. 까맣게 변해가는 시체보다도, 고깃덩어리처럼 익어가는 살점보다도, 그것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그 가족들이 훨씬 더 놀라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에게 죽음이란, 이별, 마지막, 끝과 같이 온통 서늘하고 아픈 의미들뿐인데. 그래서 도저히 침착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그들과 나의 내세관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죽음으로서 영원한 안식을 맞길 바라는 마음. 죽음을 통해 이 고단했던 삶을 끝내고 갠지스 강에 뿌려짐으로서, 그 고통스런 윤회를 끊길 바라는 간절한 기도. 결국 그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어쩌면 고통스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인 것이다.
마니까르니까 가트에 앉아 있는 동안 곳곳에서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이들은 하나같이 목청이 떠나가라 같은 구호를 반복했다.
“람람 싸드야해! 람람 싸드야해!(라마신은 알고 계신다)”
앞장 선 한 사람이 ‘람람 싸드야해!’라고 선창하면 뒤 따라오던 운구 행렬이 똑같이 ‘람람 싸드야해’ 라고 재창한다. 이는 시신이 골목골목을 지나 갠지스 화장터에 다다를 때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목소리는 어찌 들으면 씩씩하다 싶기도 하고, 또 어찌 들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처량한 노래처럼 들리기도 한다. 가트에 앉아 몇 시간째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잘가라! 행복해라!’ 라고 외쳐주는 것도 같아 나도 괜스레 소리죽여 ‘람람 싸드야해’ 라고 중얼거려보았다.
허나, 근본 우유 함유량이 높은 라시는 차갑기까지 하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했다간 배탈이 나기 십상이다. 특히 과일이 들어간 라시는 우유와 더불어 소화기능을 배가시키기 때문에 덮어놓고 막 마셨다간 지독한 급성설사에 시달리는 수가 있다.
어릴 적 스물셋 시절엔 이 라시 때문에 화장실엘 참 많이도 들락거렸었는데 처음엔 원인도 모르고 변기통을 붙잡고 끙끙 앓다 한참만에야 그 독한 설사의 주범이 라시 임을 알아챘었다. 그리곤 이렇게 생각했었지. ‘치사한 자식! 그렇게 달콤하게 다가와 놓고선 이런 무시무시한 설사를 안기다니! 배신자!’
그리고 서른이 되어 다시 인도를 찾은 나는, 뜬금없게도 이 라시를 마시는 게 꼭 사람을 대하는 것과 비슷하단 생각을 해본다. 앞에선 헤실헤실 웃으며 달콤한 말만 해주던 사람들. 그리고 그 달디 단 말들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다 뒤늦게서야 한껏 이용당하고 뒷통수를 맞고 마는 나. 그때는 몰랐다. 라시도 맛있으면 그만인 줄 알았듯이, 그저 사람도 내게 잘해주면 그걸로 된 거라 여기며 눈앞에 주어지는 대로 마구 들이키며 살았더랬다.
그러다 나이 서른을 먹고 7년 만에 블루라시를 다시 만났던 날, 그제야 뭔가 좀 알겠더라. 라시가 아무리 싸고 맛있을지언정 하루에 몇 잔이고 마구 마셨다간 결국엔 탈이 나고 마는 것처럼, 사람 역시 그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좋은 말만 해준다고 다 믿지 말고, 앞에서 잘해준다고 내 마음 다 꺼내 보여주지도 말고, 가끔은 좀 여기저기 살피고 또 가끔씩은 재고 따질 줄도 알아야 한다는 원대한 깨달음을 말이다.
마니까르니까 화장터도, 어딘가 쓸쓸한 ‘람람 싸드야해’란 외침도, 그리고 블루라시의 달콤함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인 이곳. 변한 것이라곤 오직 나 자신밖에 없는 듯한 이곳 바라나시에서, 하늘로 피어오르는 영혼과, 그들을 축복하는 남아있는 이들과, 그리고 서른의 나 자신을 위해 조용히 기도 한 자락을 올려본다.
여행칼럼리스트 jsmoon09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