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해질녘, 은은한 노을 속의 남인도 함피
한 번 매력에 빠지면 못 헤어나오는 ‘남인도 2대 늪’
키슈킨다 왕국의 중심지…곳곳에 힌두교 유적군
노을, 서서히 온기 퍼지는 온화한 하늘 ‘황홀’
주황빛 수백개 계단 올라 도착한 하누만 사원
하얀색 사원과 자유분방한 갈색 원숭이보다
통증 참으며 힘겹게 올랐던 인내의 시간 ‘소중’
함피는 남인도 카르나타카주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인도 대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키슈킨다(Kishkinda) 왕국의 중심지이자 비자야나가르(Vijayanagar) 제국의 수도이며, 한 때는 크게 번영했던 힌두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비록 마지막 힌두 왕조인 비자야나가르가 멸망을 맞으며 함피의 위상 역시 역사 속 한 줄이 되어버렸지만, 그 옛날 ‘승리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강성했던 함피의 명성은 도시 곳곳에 자리한 힌두교 유적군들이 남아 낱낱이 증명해주고 있다.
나는 고아에서부터 함피까지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함피로 이동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나 같은 배낭 여행자들은 주로 기차나 슬리핑 버스를 이용한다. 허나 기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함피 내 여행자거리로 곧장 오지 못하고 ‘호스펫(Hospet)’역에 내려 시내버스로 환승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애초에 함피 시내까지 바로 이동 가능한 슬리핑 버스를 예약했다.(버스마다 종착지가 조금씩 다르다. 함피 여행자거리까지 데려다주는 버스가 있고, 그 전 지역인 호스펫까지만 가는 버스가 있으니 예약하기 전에 꼼꼼히 확인하자.)
하지만 함피까지의 버스이동은 생각보다 고달팠다. 말이 좋아 ‘슬리핑 버스’지 실상은 조금도 ‘슬리핑’ 할 수 없을 정도로 시설이 낙후 된데다 길이 거칠어 도착하는 순간까지 줄곧 멀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창문은 반절밖에 닫히지 않아 쌀쌀한 바람이 정통으로 들어왔고, 도대체 이 좁은 공간에서 무엇을 했던 건지 침대칸 전체가 쾌쾌한 냄새로 가득 차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침낭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울렁이는 속을 가까스로 달랬던 그 새벽, 나는 다짐했다. 만일, 남인도를 여행하다 멀미가 심한 여행자를 만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함피행 슬리핑 버스만큼은 반드시 피해가라 조언해주어야겠다고.
굽이친 도로를 지나, 인도인이 바글바글 모여 있던 호스펫을 지나, 드디어 목적지인 함피에 도착했다. 함피 여행자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큰 길을 따라 3분 정도만 걸어 나오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각종 게스트 하우스와 한국어로 적힌 간판들이 심심찮게 등장해준 덕에 나 역시 찾고자 하던 숙소를 그리 힘들이지 않고 찾을 수 있었다. 자, 이제 숙소도 잡았겠다. 슬슬 남인도의 늪, 함피를 제대로 즐겨봐 주실까?
끼니도 때울 겸, 골목도 슬슬 둘러볼 겸 카메라를 챙겨 숙소를 나섰다. 사람들이 그리도 호들갑을 떨어내던 함피의 매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나는 아무리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사람들이 말하던 그 매력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곳곳에서 출몰하는 바퀴벌레, 맛없는 스프, 여기저기 바가지를 씌워대는 상인들까지. 나는 숙소를 나선지 채 2시간도 되지 않아 함피가 가진 별명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었다. ‘아니, 도대체 여기가 왜 좋다는 거야?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데?’ 하며.
“와…. 대박….”
그것은 다름 아닌 함피의 수채화 같았던 저녁 노을. 저녁을 먹고 식당을 나서던 나는,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노을을 발견하곤 그대로 걸음을 뚝 멈췄다. 타는 듯이 달아오르는 붉은 노을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그런 짙고 묵직한 하늘이 아니라, 저 구석 어딘가에서 부터 서서히 온기가 퍼져 나오는 포근하고 온화한 하늘이었다.
거리에 멍하니 서서 고 보드라운 노을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제야 뭔가 알 것만 같았다. 내가 오늘 하루를 얼마나 어리석게 흘려보냈는지. ‘남들이 함피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작 ‘내가 함피를 어떻게 느끼느냐’에 대해선 조금도 고민해보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얼마나 바보 같았나. 음식 하나를 먹어도 ‘이렇게 맛없는데 왜 여기가 좋다는 거지?’라며 의문을 품고, 샤워를 하는 도중에도 ‘온수조차 제대로 안 나오는 데 왜 함피가 좋지?’라며 질문하는 등 여행의 기준을 시종일관 ‘남’에게 두어왔던 이 온 하루가.
저 끝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분홍빛을 본 순간, 드디어 나는 ‘나’를 주체로 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남이 뭐라고 하건, 내 옆 사람이 무엇을 하건 상관없이. 그저 내가 느끼는 함피, 내가 보고 싶은 인도에 집중을 하다 보니 그제서야 이 자그마한 동네의 매력이 서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골목 어귀에서 들어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사냥개의 하울링, 이름을 알 수 없는 길거리 음식의 강한 향과, 오늘도 결국 밟고야만 특대 사이즈의 소똥까지. 내가 느낀 함피의 진짜 매력은,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꾸밈없는 시골스러움과,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아이들의 미소와,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함피 만의 은은한 저녁 풍경에 있었다.
함피에 머무는 동안 나는 꽤나 버라이어티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행들과 옥상에서 밤새도록 수다를 떨기도 했고, 하루 종일 관광을 다니기도 했으며, 또 하루는 여기저기 맛있는 것들을 찾아다니며 배를 채우기도 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던 순간. 나는 발아래 펼쳐진 황톳빛 함피의 모습에 가슴 어딘가가 찡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터질 듯한 허벅지 통증을 참아가며 이 악물고 올랐던 이 언덕. 그리고 결국엔 마주하고야만 하얀색 사원과 갈색 빛 귀여운 원숭이들. 사실 하누만 사원 자체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작고 볼품이 없었지만,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인내했던 그 모든 시간들은 이미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어마어마한 성취감을 안겼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관광도 참 많이 하고 맛집 투어도 다니곤 했었으나, 결국에 함피가 내게 남긴 것은 향기로운 음식도, 멋진 볼거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여행의 주체를 ‘나’에게로 돌려놓는 과정, 육체적 고통을 정신력으로 다스렸던 시간. 그 은은한 분홍빛 하늘 아래에서 보낸 그 모든 저녁들은, 아마 이 여행을 통틀어 가장 평온하고, 또 농도 짙은 순간순간들이 아니었을까 그리 생각해본다.
여행칼럼니스트 jsmoon09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