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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된 고택·거리 곳곳 올곧은 항일의지 서려있네

기사전송 2017-05-01, 21: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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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고장' 경북-<1>안동 법흥마을
임시정부 최초 국무령 포함 독립유공자 13人의 요람
애국지사 배출 명가 고성李氏 550년 역사·발자취 담긴 마을
항일운동 성지 임청각 등 옛모습 고스란히 간직
1910년 일제 국권 침탈 후 석주 이상룡, 일가와 만주 망명
자치 기구 경학사·군사력 양성기관 신흥학교 설립
독립의지 집결·해외 독립투쟁 기반 다져
임청각
임청각
이상룡사진
석주 이상룡 선생.
경학사조직된추가가대고산
경학사가 조직된 추가가 대고산 전경.
경학사취지서
경학사 취지서.
경북은 충절과 희생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 국난때 마다 위기극복을 위해 먼저 몸을 던져온 호국의 고장이다.

독립운동 발상지로 을미의병(1895년) 이전 안동에서 최초의 의병이 몸을 일으켰다. 이를 바탕으로 독립유공자 전국 1만1천595명 중 경북이 1천835명, 16%를 차지한다. 이중 안동이 331명이다.

자정순국장 전국 90명 중 경북이 18명으로 20%다. 혁신유림과 계몽운동도 전국에서 가장 활발해 국채보상운동(대구) 문명학교(청도) 협동학교(안동)가 운동을 선도했다. 6.25전쟁 때는 낙동강 방어선이 전세를 역전시킨 도화선이 됐다.

경북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법흥마을(경북 안동시 법흥동)은 고성이씨(固城李氏) 550여 년 역사가 깃든 곳이다.

고성이씨 가문이 안동에 자리잡은 것은 15세기 후반 이증(李增) 때부터다. 그는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해 진해·영산에서 현감으로 일했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안동으로 옮겨왔다. 그의 아들 가운데 법흥마을에 터를 잡은 이는 셋째 이명으로, 그는 임청각(臨淸閣)을 지은 인물이다.

조선시대 민간가옥으로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집을 짓고 유지할 정도로 재력 또한 상당했다.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법흥마을에는 지금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임청각과 탑동파 종택이 남아있다.

◆13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온 법흥마을

고성이씨 이증의 후손들이 550년 넘게 세거해 온 법흥마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모두 13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온 곳이다. 특히 임청각에서만 모두 9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법흥마을은 의병항쟁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었으나,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면서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했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이듬해 이상룡과 동생 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종숙 이승화는 만주로 망명했다.

이들은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를 이끌며, 만주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겼다.

나라 안에서는 이종영이 대한광복회에서 활약했고, 이상동·이승복·이을성은 3.1운동, 이종국은 1921년 의용단에 가입해 활약하다가 고초를 겪었다.

특히 함께 만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내조한 여성들의 공로 또한 적지 않다. 그 중심에는 바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이 있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이상룡

이상룡은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그의 처음 이름은 이상희(李象羲)였으나 1911년 만주로 망명, 이상룡으로 고쳐 불렀다.

이상룡은 스승·동문들과 성리철학을 공부하며, 영남의 이름 있는 유학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기울고, 명문가의 지식인으로 이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896년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항쟁을 이어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가야산에서 의병을 양성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1910년 8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이상룡은 만주 망명을 선택했다. 그 길에 가족들은 물론 법흥마을을 비롯한 문중인사 70여 명이 함께했다.

1911년 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이상룡과 김대락 일문 200여 명이 거처를 마련했다.

서울 출신의 이회영 일가 60여 명, 이동녕·장유순 등 신민회 인사들이 모두 이곳, 꿈에 터전에 모였다.

당시 이상룡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동포사회의 사회적·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것으로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주 한인들의 안정적인 생활기반이 필요했다.

둘째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자치 기구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 첫 출발이 경학사(耕學社)였다.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扶民團)과 한족회(韓族會)로 계승됐고, 남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셋째는 민족교육기관 설치와 교육활동이다. 1910년대 한인사회의 큰 목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사력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신흥학교(新興學校)를 비롯한 많은 학교를 세우고 운영했다.

넷째는 병영(兵營)의 설치였다. 신흥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백서농장(白西農庄)·마록구농장·길남장과 같은 병영을 세웠다.

고난의 과정 속에서 이상룡은 지도자로 활약, 경학사 사장이 돼 ‘경학사 취지서’를 발표, 독립을 위한 투쟁을 독려했다.

이상룡은 취지서에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의 책임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모아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갈 길이 멀고 더디다고 근심하지 말지니, 작은 걸음이 쌓여 1만 리를 갈 수 있으며, 한 삼태기도 쌓이면 태산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무렵 서간도 한인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굳센 ‘의지와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그 희망과 굳센 의지로 키워낸 사람들, 그 중심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학생들은 신흥무관학교의 군사교육을 통해 강한 정신으로 무장한 독립군으로 거듭났다. 1920년 만주지역 독립군단이 힘을 모아 이루어낸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1910년대 무장투쟁론이 일구어낸 중요한 결실이었다. 그 중심에는 망명 후 10여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독립군의 스승이자 지도자로 자리한 이상룡이 있었다. 이상룡은 1932년 만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맡았던 약 6개월의 기간을 빼고는 오롯이 만주에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이후 아들과 손자, 조카들이 성장, 1920년대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어 갔다.

◆고된 만주생활 함께한 김우락과 여성들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金宇洛, 1854~1933)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 출신이다. 그녀는 성장해 19세에 석주 이상룡의 부인이 됐다. 1875년 9월 아들 이준형이 태어났고, 이때 그녀는 만 21살이었다.

그녀는 이상룡이 만주망명을 선택하자, 57세의 나이로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뒷날 만주에서 형제자매를 그리워하며 지은 가사 ‘간운사’에 망명 당시를 회고하며 “살림과 전택을 버리고 속절없이 고국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으며, 여자의 소견으로 충의(忠義)보단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따랐다”고 했다.

그녀의 생각은 삼종의 의리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김우락은 자신의 만주생활을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던 백이와 숙제의 충절에 비유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지도자의 아내로 어려움을 꿋꿋하게 감내했다.

이상룡의 사위를 포함하면 임청각은 3대에 걸쳐 모두 10명(사위 포함)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이들 뒤에는 김우락을 비롯한 숱한 여성들이 있었다. 며느리 이중숙과 손부 허은을 비롯, 이승화(李承和)의 아내 동래정씨, 영덕 출신 독립운동가 박경종(朴慶鍾)과 혼인한 석주 이상룡의 여동생, 강호석(姜好錫)과 결혼한 석주 이상룡의 외동딸, 이형국의 아내 배화윤(裵花潤), 이봉희 아내 인동장씨, 이봉희의 아들 이광민과 혼인한 김숙로(金淑魯), 이광국의 아내 안동권씨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남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거나 국내에 남아 항일투쟁을 지원했다.

법흥마을 고성이씨 문중 여성들은 추호도 뜻을 꺾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갔다.

김상만기자 ksm@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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