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조센징’ 야욕에 가득 찬 일본을 꾸짖다
‘발칙한 조센징’ 야욕에 가득 찬 일본을 꾸짖다
  • 윤주민
  • 승인 2017.06.29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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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후미코와 日 법정 선 박열
죽음 무릅쓰고 제국주의 비판
독립투사·민중들에 희망 전해
박열
조선 전통관복을 입고 일본 법정에 출두한 박열(이제훈).
박열2
박열(이제훈)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1923년 일본 도쿄. 박열(이제훈)은 인력거 일을 마치고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의 아지트인 어묵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있던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거지 차림새의 박열에게 한 눈에 반한다.

밑도 끝도 없이 박열에게 제안한 ‘동거’. 박열 역시 그런 가네코가 싫진 않다. 결국 박열과 가네코는 동거 서약을 맺고 살림을 차린다.

그러던 어느날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한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14만여 명이 이르면서 일본 정부는 혼란에 빠진다.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한 일본은 조선인 학살을 유도, 박열을 황태자 암살 미수범으로 몰아가면서 여론의 방향을 틀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죄없는 조선인이 일본 극우파 단체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을 당하며 사상자만 6천여 명에 이르게 된다. 박열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화제를 돌리려는 일본의 꼼수를 알아채리고 순순히 체포에 응한다.

쉽게 풀릴 것이라 예상했던 박열은 불령사 동지가 ‘폭탄 의거’를 실토하면서 전략을 바꾼다.

자신이 일본의 ‘먹잇감’이 돼 민중을 뒤흔드는 여론전을 택한 것이다. 박열과 가네코는 옥중에서도 ‘단식 투쟁’을 벌이며 서신을 통해 서로의 사상을 확인, 사랑을 키워 나간다. 그러면서 재판장에 쏠린 관심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조롱으로 돌려 버린다.

영화 ‘박열’은 등장 인물 모두 실존 인물이라는 문구와 함께 시작된다. 6천여 명의 조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최고 불량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의 실화를 그려낸 작품이다.

이준익 감독은 “실제 역사적 사건과 90%이상 일치하게 만들었다”면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했다.

실제 사건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아냈다.

당시 조선일보와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던 내용을 영화속으로 끌어들이면서 신빙성을 입증한 부분도 돋보인다. 조선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한 사진, 재판장에서의 모습은 당시 박열과 가네코의 사진을 그대로 재현했다.

영화 속 내용이 90%이상 실제 사건과 일치한 ‘박열’은 흥미롭다. 목숨을 져버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박열의 기개와 이에 질수 없다는 듯 나서는 가네코의 연설은 일본 제국주의를 꾸짖는 통쾌한 모습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재판장을 자신들의 결혼식처럼 꾸민 일은 되레 박열의 뜻대로 이뤄진다. 분노한 재판관이 2차 재판부터 비공개로 진행하자 민심이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박열이 재판에 앞서 내세운 조건이 이같은 결과를 낳았다. 결국 폭탄으로 성공하지 못한 뜻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조롱으로 되갚은 것. 이로써 조선에 있는 독립투사는 물론 전국민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일본에 맞선 것이다. 실제 박열은 재판장에게 반말을 했다고 한다. 그가 사형을 선고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인상적이다.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영화 내용상 일본에 대한 반정서감은 당연지사. 그러나 이 보다 가슴에 와닿는 것은 박열에 대한 존경심이다. 22세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자처, 조선은 물론 외신에게까지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박열이 공판에 앞서 요구한 4가지 조건은 총, 칼보다 더욱 강력했다. 첫번째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말것, 두번째 재판장과 동등한 위치의 좌석을 설치할 것, 세번째 조선 관복을 입을 수 있을 것, 네번째 재판에서 일본어 대신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사실상 천황 숭배에 대한 비판과 불굴의 민족 정신을 과감없이 나타냈다.

일본 정부는 3·1운동을 가까스로 진압했기에 박열과 가네코의 사형 선고를 천황 폐하의 은사로 감형한다면서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이후 박열과 가네코는 각각 치바형무수와 도치키 형무소로 옮기면서 떨어지게 된다. 가네코는 옥중에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자서전을 내지만 향년 23세 이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자살과 타살이라는 설이 많지만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고 한다.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해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 1945년 10월 27일 석방된다. 석방 이후에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열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안장시키면서 애국에 힘을 썼다.

윤주민기자 yjm@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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