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동북공정’ 맞서 대조영 후손들이 만든 ‘작은 해동성국’
中 ‘동북공정’ 맞서 대조영 후손들이 만든 ‘작은 해동성국’
  • 김지홍
  • 승인 2017.07.0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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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발해마을
대중상 31세손 태순금 일족 이주
37가구 80여명 ‘전국 유일 집성촌’
후손 78명 사진 근거 두상 등 복원
고황제 ‘대조영’ 영정 제작·봉인
발해 문화 관광명소 만들기 한창
왕릉 복원·역사 기념관 건립 추진
대웅전 목조아미타불상 ‘경북 최대’
문정공 안지 배향 위한 서원
“중국 역사 왜곡, 정부가 안 나서니 후손이 나서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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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대조영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경북 경산의 역사적 자랑 발해마을 전경. 드론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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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동상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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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태극기와 발해를 상징하는 깃발들이 보인다.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渤海)는 698년부터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 존속하며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다. 문왕 때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육로를 뚫어 ‘신라도’가 생겼고 선왕 때 발해의 영토가 가장 넓었다. 발해는 바다 동쪽에서 번성한 나라라 해서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사라진 ‘해동성국’이 경북 경산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경산시 남천면 송백2리 산아래를 지나가다보면 말을 탄 ‘대조영’ 실루엣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대조영의 후손 37가구 80여 명이 모여 사는 집성촌 ‘발해마을’이다. 후손들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를 반박하고 그 뿌리와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작은 해동성국’ 만들기에 나섰다.

대조영 실루엣을 따라 골목 어귀로 들어가면 태극기와 발해를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인다. 깃발은 대조영의 ‘대(大)’를 더 큰 ‘태(太)’라는 의미로 음양의 기운을 받은 우주 만물을 축소한 태극마크다. 마을 곳곳에는 해동성국의 전통 갑옷을 입은 늠름한 장군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이 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의 31세손 태순금 일족이 이주해오면서 터를 잡았다. 부유한 마을이었다. 당시 후손들은 마을을 둘러싼 산 넘어 청도 일부까지 모두 땅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재산인 구율미를 한 마을에서 대체할만큼 부자 동네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는 상현사에도 남아있다. 마을의 긴 담벼락을 따라가다보면 상현사가 나온다. 상현사에는 대조영의 영정이 봉인돼있다.

영정은 후손들의 대상으로 두상 복원 작업을 통해 제작됐다. 2012년 10월 국가 표준영정 제86호로도 지정됐다. 조용진 서울교육대학교 미술해부학 전 교수는 지난 2009년 후손들을 대상으로 ‘발해 고황제 대조영 영정제작을 위한 두상복원’을 작업했다. 조 전 교수는 개인의 특징은 일생에 걸쳐 특별히 많이 바뀌지 않고 형질 자체는 후손에게 계승돼 왔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추출 가능하다고 봤다. 전북 남원과 경북, 서울에 사는 후손 총 78명의 얼굴을 사진 촬영했다. 그 결과 대조영은 이마가 좌우로 발달했고 눈썹이 진하고 짧으면서 눈썹산이 높고, 코는 끝이 크지 않고 길었다. 입술도 두텁고 뺨은 두터워 살이 많은 편이었다. 조 교수는 당시 머리 둘레가 유독 큰 것은 태씨만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정은 발해마을과 서울대 박물관 등 단 두 곳에만 보관돼있다.

상현사에선 영정을 향해 해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에 대조영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낸다. 전국에서 모여든 태씨 종친은 150여 명, 모두 금관제복을 입고 집례에 나선다. 유독 머리가 크다는 후손들은 실제로 제사를 지내다보면 제사모가 안 맞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대’씨와 ‘태’씨가 크다는 뜻으로 통용된다고 한다. 고려사의 ‘동사통감(東史通鑑)’에는 태조 왕건이 큰 대(大)와 클 태(太)는 통용하는 자로, 발해 고황 대조영에 관한 기록을 할 때 태조영이라고 해 태조가 대씨에서 태씨로 사성(賜姓)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손들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호적제도가 만들어지면서 ‘호적법’이 제정되면서 ‘태’씨로 정했다고 한다. 현재 태씨는 전국에 9천가구 1만명에 이른다. 이 중 경산 발해마을 출신이 20% 정도 차지한다.

발해마을은 전국에서 유일한 태씨 집성촌이다. 선비 가풍을 이어온 후손 37가구에는 ‘발해 △△세손’이라는 문패가 달려있다. 발해에 대한 자부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들은 지난해 농촌진흥청 공모사업인 농촌건강장수마을 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 건강관리와 사회활동, 환경정비, 소득 활동 등 4가지 테마로 주민 복지를 돕고 체험형 휴양마을로 육성하겠다는 청사진을 세웠다. 이 때 마을 입구에 대조영 실루엣 조형물을 설치하고 마을 곳곳에 벽화를 그리는 등 스토리를 입혔다.

발해왕조제례보존회는 더 나아가 발해문화마을종합개발 사업을 추진해 발해 문화를 알리고 관광 명소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올해부터 발해마을해설사도 양성하고 있다. 지난 6월부터 해설사 7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 중이다. 앞으로 대조영 왕릉을 복원하고 역사기념관, 역사 공원도 건립할 계획이다.

글=최대억·김지홍기자

사진=전영호기자

◇경흥사

경흥사는 동학산(動鶴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동학산은 학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경흥사는 학의 부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659년(신라 태종무열왕 6) 혜공(慧空)이 창건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났을 때 유정(惟政)이 머물렀다고 하며,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에 탔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과 칠성각·산신각·승당·요사 등과 절터의 유적을 보면 한 때 매우 큰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안에 봉인된 목조아미타불상이 경북 내 가장 크고 우수한 조각품으로 유명하다. 경흥사는 발해마을과 15분 정도 떨어져 있다.

◇조곡서원

1794년(정조 18년)에 자인의 유림과 탐진 안씨 후손이 그 선조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와 그 4세손인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를 배향하기 위해 세웠다. 서원은 정면의 산형대문(山形大門)을 들어서면 마당 건너편에 강당(講堂)인 상경재(尙敬齋)가 자리 잡고 있다. 팔작기와집인 강당의 좌우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강당 뒤에는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있다. 매년 3월 상정에 배향한다.

◇삼성역

경산시 남천면 삼성2리에 있는 경부선 삼성역이 관관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삼성역은 1921년 9월 20일 신호소로 개설됐다. 지난 1926년 보통역으로 승격됐지만 2004년 승객 감소로 간이역이 됐다. 1950년대 전형적인 간이 역사 모양으로 지어져 보존돼있는 흔치 않은 건물이다. 경주시는 삼성역을 리모델링해 역전교를 빛의 터널로, 역사 내 수령 60년 이상 된 벚나무를 심어 쉼터로 조성했다. 또 경전철연구소와 연계해 현장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간이역 내 열차 북카페, 전망데크 등을 설치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중국에서 자꾸 역사를 왜곡하니까 화가 났어요.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지도 않고. 결국 후손이 나서야 겠다고 생각했지요.”

태재욱(76·사진) 발해왕조제례 보존회장은 중국이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역사 왜곡에 대해 비판했다. 태 회장은 “뿌리 있는 우리 가문을 왜곡해 너무 화가 났다. 이대도 있다간 말도 안되는 상황까지 갈 것 같아서 우리가 직접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후손 인구 수가 많지 않아 더 힘을 모아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또 “국사 교과서에는 ‘대조영의 발해 건국(698년), 멸망(926년)’이라고 간단하게 나온다. 집성촌인 발해마을을 알려 발해의 광활한 영토와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타지 생활을 해왔던 태 회장은 지난 2004년 종묘사 종증대표를 맡으면서 마을에 정착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시작된 움직임은 전국 각지에 흩어진 종친들이 대대로 내려온 교지 등 문서 유품 등을 기증해주면서 힘을 보탰다. 태 회장은 “종손 중 한 분은 문서와 유품이 너무 많자 보관할 곳이 없고 점차 종손 예우도 해주지 않자 슬픔이 커져 집을 아예 불 태워버린 적이 있다고 들었다”며 “3일 밤낮으로 불에 탈만큼 많은 양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귀중한 역사 자료가 없어진 것이니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태 회장은 자신이 직접 사비를 들여 족보(族譜)를 만들고, 현재 모아둔 발해 역사 자료를 컴퓨터로 옮기는 디지털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대씨·태씨 중앙종친회에서 공로패를 줄만큼 인정 받았다.

태 회장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190년 된 집에서 살고 있다. 집의 일부는 리모델링됐지만 ‘ㄷ’자형 기와집 형태의 원형은 그대로 남아있다.

태 회장은 자신의 집을 비롯한 마을 전체를 관광명소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다. 경산시와 협조를 통해 마을 곳곳에 역사 전시관과 발해 왕릉을 재현한 역사 공원도 만들 계획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발해에 관심을 갖고 발해 마을을 찾아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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