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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전해진 선조들의 흔적…삶의 길을 생각하다

기사전송 2017-07-31, 22: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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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기와·초가집 150여채 남아
500년 전통가옥 구조 ‘한눈에’
국내 최대 규모 종가 ‘서백당’ 등
씨족 공동체 문화도 볼거리
조선시대 전통문화 맥 보존 인정
201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선비의 얼’ 담은 건축물
한옥과 자연의 만남
1천 년 넘은 왕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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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양동(良洞)마을은 ‘군주를 어질게 도울만한 인재가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안동 하회마을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 씨족 마을이다. 드론 촬영

경북 경주 양동마을은 우리나라 500년 전통가옥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고건축의 전시장’이라 불린다. 전통 향기를 품은 150여 개의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중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만 한옥과 서당, 정자 등 약 20여 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이름을 올렸다.

양동마을은 안강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포항 쪽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다. 형산강과 안락천, 기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아늑하게 들어서 있다. 풍수에 따르면 합수 지역은 부(富)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마을도 풍수론에 벗어나지 않고 많은 인재와 부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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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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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형성된 양동마을은 건축과 자연이 잘 어우러진 전통가옥이 많다.

◇인재 배출한 조선 학문의 전당

마을 이름인 양동(良洞)은 ‘군주를 어질게 도울만한 인재가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안동 하회마을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 씨족 마을이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月城 孫氏)와 여강 이씨(驪江 李氏) 가문이 정착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살아왔다. 조선시대 초기에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양동마을에 터전을 잡았다. 당시에는 딸을 시집으로 보내지 않고 사위를 데리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 손소의 사위인 이번이 들어오면서 두 성씨가 함께 살아가게 됐다.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1463∼1529) 선생은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문신이다. 손중돈 선생은 늘 업무가 끝나면 곧 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권력을 잡았어도 뇌물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검소함은 천장에 비가 새고 자리가 해어져 떨어져도 신경쓰지 않았으나 업무에 있어서는 주도면밀했다고 전해진다.

손중돈 선생은 조카인 이언적을 데리고 다니면서 학문을 가르쳤다. 이번의 아들인 회재 이언적 선생(1491~1553)은 조선시대 성리학 선구자로 퇴계 이황 선생의 스승격이다. 우리나라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학자 동방오현에 뽑힌 인물이다. 위패는 조선시대 왕가의 사당인 종묘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 배향됐다. 신하 또는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를 받았다.

이 마을에선 우재 손중돈 선생과 회재 이언적 선생 등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 과거급제자는 손씨 문중에선 25명(문과 5명, 생원·진사 15명, 무과 5명)이 배출됐다. 이씨 문중에서는 83명(문과 19명, 생원·진자 59명, 무과 5명)이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마을 출신의 합격자 수는 경주시 전역에서 절반 이상이 되는 수치로 알려졌다.



◇한국을 보여주는 ‘세계유산’

양동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은 2010년 8월 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씨족 마을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우거진 산을 뒤로 하고 강과 탁 트인 농경지를 바라보는 마을의 입지는 유교적 양반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건축과 자연이 잘 어우러진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건축물이 많다는 점이다.

집들의 기본 구조는 대개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ㅁ’자형이거나 간혹 대문 앞에 ‘一’자형 행랑채를 둔다. 1992년 마을을 방문한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故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마을이 너무 아름답다”고 극찬한 바 있다.

현재 전국에서 조선 전기 때 가옥은 10채 정도 남아있는데, 양동마을에 4채가 있다. 서백당(書白堂, 중요민속문화재 23호)과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이다.

월성 손씨의 종가인 서백당은 양동마을 시조인 양민공 손소가 짓고 살았던 집이다. 서백당 또는 송첨이라 부른다. 서백당(書白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다. 우리나라의 종가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대가옥이다.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 중 하나다. 사당 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경북 기념물 제8호로 지정돼 있다.

무첨당은 회재 선생의 아버지인 이번이 살던 집으로, 사랑채 성격의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외부 손님을 접대하고 불천위 제를 모시는 등의 문중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고 문중 사람의 화친을 도모하는 씨족 공동체의 상징적 공간이다.

향단은 1543년 회재 선생이 경상감사로 부임할 때 어머니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이 지어준 집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 구조를 가진 아름다운 건물이다. 원래 99칸이었으나 일부는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 56칸이 보존돼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관가정은 우재 손중돈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해 살던 집으로 자손과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 담겼다. 격식을 갖춰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 건축으로 행랑채·사랑대청·안사랑채·마당이 모두 연결돼 있는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양동마을은 무엇보다 유교 사상과 생활 관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후손에 깃든 무형 유산

매일 오전 6시가 되면 마을 전체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자녀 혼례일·품앗이 행사 등 오늘의 주요 일정을 알려준다. 전통 혼례가 있는 날이면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다. 양동마을에는 현재 119가구(남성 121명·여성 133명)가 산다. 전원 생활을 즐기기 위해 들어온 가구를 제외하곤 90% 이상 농사를 짓는다. 조선 중기 때는 곡식 만 석을 거두어들일 만큼 땅과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인 만석꾼이 있을 정도로 부자 동네였다.

양동마을의 전통 의례·놀이 등이 대대손손 원형 그대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노력 덕분이다. 생산·생활·의식 등 모든 영역을 유지해온 사례는 매우 드물다.

사실 주민들은 높은 자긍심만큼 고민도 많다. 원형을 보존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편함이 따르기 때문이다. 옛 가옥을 그대로 보존하다보니 편의 시설을 지을 수 없어서다. 최근에는 양동마을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주민형 관광 개발’을 기획 중이다. 양동이 추구하는 목표를 1순위로 유지하되 0순위를 주민들의 행복한 삶으로 정한 것이다. 주민이 행복하면 양동마을도 더 책임있고 끈끈한 정신적 가치가 이어지지 않을까하는 뜻에서다.

글=이승표·김지홍기자

사진=전영호기자
◇옥산서원

옥산서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위패를 모시는 사액서원이다. 그는 서원 앞 너럭바위에 ‘마음을 씻는 대’라고 해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씨를 새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된 1572년(선조 5) 유학자들이 뜻을 모아 서원을 세웠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무너뜨리지 않고 남겨둔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서원 중 가장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질본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옥산서원은 출입구와 공부하는 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놓인 서월 건축의 전형적인 구조다. 건물 곳곳에는 내로라하는 서예가들의 글씨가 있다. 경주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 무변루 현판은 석봉 한호, 서원내의 비각 안에 쓴 현판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이다.



◇독락당

독락당(獨樂堂)은 이언적의 옛 집 사랑채이다. 1530년(중종 25)에 조선 중기 문신인 김안로와 대립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이곳 자옥산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독락당의 건물을 보면 한옥과 자연의 만남을 잘 보여준다. 담장에 살창을 내어 집 안에서 바깥쪽 개울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주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흥덕왕릉

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춰진 대표젹인 왕릉이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의 무덤으로 1963년 사적 제30호로 지정됐다.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대체로 일치하며, 왕릉 주위에서 ‘흥덕(興德)’이라 새겨진 비석 조각이 발견됐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 비교적 커다란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해 무덤을 보호하고 있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고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했다. 탱석과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했다. 무덤의 주위 4귀퉁이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마리씩 배치했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했다.

이시환 부회장

‘젓먹기 어린이일 때가 엊그젠데, 벌써 경로당 멤버라니’

이시환(69·사진) 여강 이씨 대종회 부회장이 최근 양동마을 경로당에서 읊은 시다.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외지 생활을 해오다 몇 해 전 아예 고향에 살림을 차렸다. 그는 한 평생을 꾸려온 도시 생활을 당장 접기 힘들어 ‘사촌삼도(四村三都)’ 생활을 한다고 했다. 일주일 중 4일은 시골인 양동마을에 있고 3일은 도시에 볼 일을 나간다는 뜻이다.

이 부회장은 양동마을의 ‘원조’ 어르신들이 오가는 경로당에서 노인에 대해 ‘경험의 알을 품고 있다’고 비유했다. 그는 “주마등처럼 지나간 세월에 놀라웠다”며 “양동마을은 세계적인 명성이 자자한 곳이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가옥도, 사람도 모든 것이 전통 그대로 숨 쉬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양동마을이 ‘품격있는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는 마을의 대표적인 조화로 산수(山水)를 꼽았다. 이 부회장은 “산과 나무와 들, 정자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마을”이라며 “인간과 자연의 심리적 조화도 탁월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 부른다. 이 사회에선 모두가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며 “현대인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선물해주고 싶다. 사색적인 삶이 가능한 양동마을을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양동마을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오랜시간 느긋하게 머물러 있는 것을 추천했다. 그는 “살아있는 역사는 무형이다. 대대로 이곳에 살아온 양동주민들의 걸음걸이, 언행 등 생활방식을 그대로 느끼면 그들만의 여유로움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양동마을이 피로사회를 탈출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마중물의 역할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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