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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이강년 나라 위한 마음 싹 틔운 곳

기사전송 2017-08-03, 21: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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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순의 역사·문화 숨결 따라-<9> 문경시
“이 고개 넘어가면 장원급제”
팔도 선비들의 핫플 ‘문경새재’
광화문·양반가 재연 세트장
도자기·옛길박물관 등 볼거리
석탄박물관-가은오픈세트장
석탄박물관 및 가은오픈세트장 전경

문경의 지명은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따왔다. 기쁘고 경사롭고 상서로운 소식을 듣는 곳이란 뜻이다. 그 옛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여러 갈래의 길 중 문경새재를 넘어가면 과거에 급제하는 소식을 제일 먼저 듣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 또 충청도와 경상도의 모든 소식이 높고 험난한 문경새재를 넘어서야 비로소 한양에 전해질 수 있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문경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영남대로의 가장 험한 고갯길인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오고가는 나그네의 간절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픈 마음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우는 문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구국을 위해 목숨 바친 영원한 의병장 운강 이강년

문경은 지리적으로 충청도와 인근하며 대한민국의 중심원에 속해 있어 구한말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의병 활동의 선봉장에 섰던 역사적 인물 가운데 문경이 낳은 운강 이강년 장군을 빼놓을 수 없다.

이강년은 1858년(철종 9)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혈맥을 잇는 양반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난 이강년은 출생부터 비범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태양이 입으로 쑥 들어오는 어머니의 태몽에서부터 태어날 즈음에는 마을 둔덕산이 연일 크게 울더니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그쳤다는 이야기에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3세 때부터 한문을 익힐 만큼 총명하여 어린 나이에 문장과 학문이 성숙하였고, 8척이 넘을 만큼 큰 키에 기골이 장대하여 대장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22세 때 정시 무과에 합격하여 종 6품인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정국의 혼란과 친일파의 행동에 격분해 1884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 문경에 은거하였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발발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이강년은 문경 농암장터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안동부 관찰사를 처단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펼쳤다. 1907년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영월 주천에서 40여 의진이 집결한 가운데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이강년은 그해 문경 갈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 시작해 전투하는 곳마다 큰 승리를 이루었다.

항일의병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강년 의병장의 의병 활동은 남다른 점이 많았다.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옷가지나 음식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전투하며 움직이는 유격전 등 전략과 전술을 지능적으로 펼치면서 일본과의 전투에서 실질적인 전과를 올렸다.

이강년 의병장은 단순한 수장이 아니었다. 체계적으로 의병을 통솔하기 위해 부대 편성과 명령체계, 행진법과 금고령(金鼓令) 등 군대 운영법을 두루마리에 직접 적어 만든 『속오작대도』는 그가 남긴 탁월한 업적 가운데 하나다.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인『속오작대도』는 현재 군의 체제에 대입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군사 기록물로 남아 있다. 또 특수부대를 구성한 기록을 담은 『운강창의일록』 등이 남아 있어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08년 청풍 까치산 전투에서 왜군의 총탄에 발목을 맞아 생포되어 같은 해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의병활동 13년 만에 교수형으로 장렬히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강년 대장을 중심으로 하여 펼친 전투는 가장 용감했고 체계적인 의병 활동으로 평가 받고 있다. 가족보다 나라가 먼저였고 스스로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다해 싸웠던 의병장 이강년. 그가 몸으로 보여주었던 행동은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큰 지표가 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평화와 안락을 누릴 수 있는 근원이 된 게 아닐까.

문경시 가은읍에는 이강년 의병장을 기리는 ‘운강이강년기념관’이 있다. 2002년 개관한 이 기념관에는 유물전시관, 생가, 사당 등이 있고 매년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기념관 뜨락에는 이강년이 옥중에서 쓴 글 한 편이 비석에 아로새겨져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일평생 이 목숨을 아껴본 바 없거늘

죽음 앞 둔 지금에서 삶을 어찌 구하리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하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 해도 넋마저 사라지랴

박열의사
박열의사 기념관


◇독립을 위한 불굴의 애국지사 박열

36년의 일제 식민치하를 겪으면서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문경 출신 박열도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표적인 역사 속 인물이다. 박열은 문경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학문에 매진하며 유달리 총명하고 범상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학교 시절, 한국인 교사 이순의로부터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 교육을 시켰다는 양심선언을 듣게 된 게 반일사상에 눈 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박열의 인생항로는 오로지 일제에 항거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진다. 국비장학생으로 경성고보 사범과에 재학 중이던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지하신문을 발행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학교를 자퇴하고 식민지 조선 청년이 택한 독립운동의 근거지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박열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모든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 권력기관이라는 강제 수단의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인 아나키즘에 매료되고 만다. 마침내 아나키스트가 된 박열은 평생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나게 되면서 항일 투쟁은 더욱 가열된다. 1923년 가네코 후미코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불령사를 만들어 보다 적극적인 반일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은 조선인 대학살을 시도했고 박열은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에 의한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를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대역사건이라 보도하였다.

박열은 재판 과정에서도 비범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의 관복을 입고 조선말로 할 것을 당당히 요구하였고 첫 공판 때 박열은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를,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였다. 일본 재판장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1926년 3월 두 사람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변호를 맡았던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후미코는 옥중에서 결혼하였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23살의 나이로 옥중 사망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일본의 패망과 석방 운동을 통해 22년 3개월 동안의 긴 옥중 생활을 마치고 석방하게 된 박열은 재일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해 초대회장을 역임하는 등 건국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다 서울에서 인재양성과 국민계몽을 위해 박열장학회와 박열문화연구소를 설립해 활동하던 중 6.25를 만나 북한으로 피랍됐다. 북한에서 73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는 동안 그가 보여준 구국의지와 희생정신은 만인의 귀감이 되고 남음이 있다.

박열은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1993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후 2012년 고향인 문경시 마성면에 박열의사기념관이 개관되었다. 기념관 옆쪽에는 2003년에 먼저 자리 잡은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있고, 전시실에는 박열 의사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비롯해 가네코 후미코의 사상과 그녀가 남긴 시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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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박물관

△도자기박물관

문경 도자기는 전통과 역사가 깊어 천한봉, 김정옥, 김성기 등 유명한 도자기 장인을 많이 배출했다. 문경에는 조선 초기 분청사기와 백자요가 많이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옛 도공의 정신을 그대로 살린 고유한 색채와 형태가 대대로 내려오고 있어 문경 도자기의 가치는 더욱 높게 평가 받고 있다. 문경읍내에 위치하며 전통 도자의 맥을 그대로 잇는 도자기박물관은 3개의 전시실과 다도체험 공간, 야외공방 등을 마련해 품격 있는 도자기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문경새재 및 가은 오픈 드라마 촬영장

문경에는 사극 드라마 촬영장이 두 곳 있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사극 대하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하여 2000년 문경새재 제1관문 뒤 용사골에 건립한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과 가은읍 왕능리에 위치한 가은 오픈 세트장이 있다. 문경새재 촬영장은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대조영 등 많은 드라마의 배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가은 촬영장은 드라마 연개소문, 대왕세종, 천추태후, 근초고왕, 별순검 등의 배경으로 사용됐다. 두 곳 모두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 촬영장으로 광화문, 경복궁을 비롯해 양반가, 초가 마을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옛길박물관5
옛길박물관

△옛길박물관

문경은 조선시대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가 있어서 길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한데 모아 길 위의 역사와 고개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우리나라 유일한 옛길박물관이 있다. 보부상이 자주 드나들었던 옛길 위에서 펼쳐졌던 문화는 무엇이며, 길 위에서 이루어졌던 각종 여행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아리랑에 얽힌 이야기는 어떤 것인지 길과 관련한 전문 박물관으로 길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잉카·마야박물관 & 캠핑장

문경에는 이색적인 중남미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잉카·마야박물관이 있다. 문경시 가은읍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잉카·마야박물관은 개인 박물관으로 토기류를 비롯해 목각기류, 고서적, 옷, 악기, 가구 등 다양한 문화 유적을 감상할 수 있다. 운동장 한 켠에 따로 캠핑장을 마련해 가족 단위로 휴가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자유기고가 ubr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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