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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등 유학자 150여명 배출…‘경심잠’ 남겨 후손 교육

기사전송 2017-08-28, 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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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사촌마을
“경로 효친·나눔 등 ‘양반 문화’ 녹아 있는 마을”
김희윤 안동김씨 21대종손
기와집 많아 ‘영남의 瓦海’ 불리기도
‘이웃 구휼’ 입소문 호남까지 퍼져
가로숲 1㎞ ‘천연기념물 제405호’
한석봉이 현판 쓴 만취당은 ‘보물’
임란 등 의병 참여 忠·義 실천 앞장
의상대사·최치원이 지은 절
삼복땐 얼음·겨울엔 김 ‘모락모락’
의성(19)
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은 620년의 전통이 내려온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해 개인의 재산을 털어 많은 굶주린 백성들을 챙겼던 안동김씨 김사원의 후손들이 그의 뜻을 이어받아 살고 있다. 드론 촬영



‘송은공을 빼닮은 자손이요 / 퇴계 선생의 문도로세 / 서재 숨어 수양하니 / 묵은 솔의 옆이로세 / 날 아는 이 적다한들 / 품은 회포 상할손가 / 빼어난 자손에 미쳐 / 명성 영광 빛나리라.’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1720 ~1799)이 지은 만취당 김사원(金士元, 1539~1602)의 묘갈명이다.

김사원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퇴계 이황의 제자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해 개인의 재산을 털어 많은 굶주린 백성들 진휼(賑恤)해 추앙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규합해 정제장(整齊將)으로 추대됐다. 그의 고고한 품격은 경북 의성 점곡(點谷)면 사촌(沙村)리, 이른바 ‘사촌마을’에서 그대로 내려온다. 이 마을에선 송은 김광수·서애 류성룡 등 40여 명의 과거 급제자와 뛰어난 학자가 배출돼 지난 600년 간 의성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양반마을로 명성이 높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선비 문화

사촌마을은 14세기 말부터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다. 1392년 안동 김씨 김자첨(金子瞻)이 안동 회곡(檜谷)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을 이뤘다. 지금으로부터 약 620년 전이다. 이후 혼인을 통해 안동 권씨, 풍산 류씨가 정착하면서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 풍산 류씨가 중심이 되는 마을이 형성됐다. 사촌이라는 지명은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 따 지었다. 기와집이 많아 ‘영남의 와해(瓦海, 기와의 바다)라 불리기도 했다.

마을은 출가한 여인들이 친정으로 돌아와 애를 낳는 것을 원치 않는 풍습이 있었다. 걸출한 인재들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만취당 김사원부터 행정 권식·송은 김광수·천사 김종덕·만동 김양범·우강 김호직·민산 류도수·자계 류도희 등 많은 유현들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과에 급제한 사람 18명과 소과 급제한 사람이 31명 등 문집과 저서를 낸 유학자를 포함하면 150명에 이른다.

자손들은 입향조의 증손 송은 김광수(1468~1563)가 남긴 ‘경심잠’(警心箴)을 기치로 삼았다. 경심잠은 사친(事親)·보군(輔君)·제묘(祭廟)·정가(正家:齊家)·우애(友愛)·근형(謹刑)·폐참(廢讒)·신색(愼色)·결우(結友)·안빈(安貧) 등 10조목(條目)으로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잠언집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나라에 대한 충성 등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실제로 벼슬에 오른 인물이 많았지만 부자 동네는 아니었다. 마을에는 만석군은 물론 천석군도 없었다. 만취당은 고작 수십 마지기 논밭으로 가난한 주민을 돕는 데 힘썼다. 주민들은 대부분 봄에 식량을 꿔 먹고 가을에 수확을 하면서 갚아나갔다. 보통 양반들은 이를 빌미로 토지를 빼앗았다. 김사원은 갚지 못하면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차용증서를 오히려 찢어버렸다. 김사원은 “차용증을 쓴 것은 빌려간 곡식을 갚는데 애를 쓰라는 뜻이지 논밭을 뺏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이런 것을 취해서 뭣하냐.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며 위로해줬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굶주린 주민들에게 곡식을 내놓아 구휼했다. 부녀자 걸인이 오면 오히려 더 옷을 갖춰입고 맞이했다. 이는 호남까지 입소문이 나 타 지역의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김씨의 의로운 창고’라 해 ‘김씨의 창’이라고 불렀다.

사촌마을은 충(忠)·의(義)를 실천한 마을이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앞장섰다. 임진왜란 때는 김사원은 의병장인 정제장으로 추대됐고, 동생 김사형과 김사정도 곽재우 의병장 지휘 아래 함께 싸웠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728년(영조 4)무신란 때 의성 의병을 이끌었다. 1896년 일제강점기 병신의병 때도 사촌의 온 마을 주민들이 의병에 참여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순국했고, 일본인에 의해 마을의 기와집 수십채가 불에 탔다. 6·25전쟁 때도 화마를 겪어야 했다. 마을의 오랜 역사와 달리 오늘날 남아있는 고택이 100여년 전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인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을의 역사와 오롯이 함께해온 ‘사촌가로숲’은 주로 팽나무·상수리나무 등 참나무류 500여 그루로 수령 600년에 이르는 나무들이 우거져 장관을 이룬다. 천연기념물 제405호에 지정돼있다.

◇사촌마을의 600년을 담은 고즈넉한 고택

마을의 역사와 오롯이 함께해온 ‘사촌가로숲’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사촌리가로숲은 주로 팽나무·상수리나무 등 참나무류 500여 그루로 수령 600년에 이르는 나무들이 우거져 장관을 이룬다. 길이 1km에 폭은 45m 정도의 숲길이다. 마을에서는 서쪽에 있는 숲이라 해 ‘서림’이라고도 부른다. 천연기념물 제405호에 지정돼있다.

사촌가로숲이 조성된 이유도 놀랍다. 사촌마을은 영남 8명기 중 하나로, 세 정승이 나올 수 있는 명당 자리로 꼽힌다. 하지만 이곳에 터를 잡던 김자첨은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라며 풍수지리의 비보 사상(산천의 역처나 기운이 허한 곳을 보충하기 위해 사찰이나 나무를 심는 것)으로 ‘사촌가로숲’으로 조성했다. 마을은 뒷산에 문필봉이, 왼쪽으로는 좌산이 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우측은 광활해 우백호가 없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사촌가로숲과 함께 거센 풍파에도 살아남은 대표적인 마을 건물은 만취당(晩翠堂)과 후산정사 그리고 만취당 마당에 있는 향나무다.

만취당 건물은 1585년 김사원이 3년에 걸쳐 지은 건물이다. ‘오랫동안 푸르다’, ‘늙어서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는 뜻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도리와 대량의 구조결구법 등 당시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한옥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모여 하나의 주거 공간으로 통합되는 건물 형태로 조선 중기 대표 한옥으로 꼽힌다.

만취당의 현판은 조선 중기의 서예가 한호 한석봉이 썼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라 전해진다. 만취당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에서 보물 제1825호(2014년 6월)로 승격 지정됐다.

만취당 마당의 향나무는 ‘만년송’이라 불린다. 역사학자들은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지만 이미 김광수의 호 ‘송은’이 만년송에서 나왔다는 전설이 내려와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후산정사(後山精舍)는 만취당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내에는 외삼문·중정당·사당 등이 세워져 있으며 해마다 춘추정일에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마을에는 마을의 유래와 유물 등을 전시해놓은 사촌마을자료관과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의성의병기념관이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1천700명의 외지인들이 기념관을 방문했다.


안동김씨 종손 21대손 김희윤

“충(忠)·의(義)로 지켜온 마을이죠. 주민들의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안동김씨 종손 21대손 김희윤(67·사진) 선생은 620년을 이어온 안동김씨 종가집에서 살고 있다. 건물이 불에 타 새로 짓고 구석구석 보수 공사를 거쳤지만, 종가집 터는 620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김 선생은 “오랜 세월 동안 종가 터를 단 한 번도 옮기지 않은 문중은 전국에서 드물다”며 “마을이 다듬어지고 재조명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김 선생은 사촌마을의 핵심은 ‘경심잠(警心箴)’이라고 했다. 마음의 수련 덕분에 역사상 방정에 의해 희생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그는 “경심잠은 사촌이 존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교훈”이라면서 “현대에 와서도 이 연장선상에서 경로 효친의 전통이 잘 지켜지고 나눔의 문화가 몸에 배여있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관광보다 마을의 의미와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고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촌마을은 현재 안동 김씨만 60여 가구가 산다. 김 선생은 “양반 동네여서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외지인들이 많다. 하지만 이곳에 발령 받았던 공무원을 보면 전입할 때 울면서 들어왔다가 오히려 타지로 떠날 땐 울면서 떠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우리 마을은 까탈스러운 양반 문화가 아닌 함께하는 문화가 녹아있다. 그만큼 이웃과 정을 나누고 배려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사촌마을의 전통 문화가 이어지길 소망했다. 그는 “선조들의 가르침이 엇나가지 않고 경로효친의 전통적인 미덕이 화목한 마을의 토대로 쭉 이어지길 바란다”며 “이 문화가 다른 마을에도 전파돼 널리 알려지고 함께 실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운사

의성군 구계리의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등운산이 있는데, 산의 서쪽 사면을 타고 흘러내린 산자락은 반쯤 피어난 연꽃 형상이다. 신라시대(681년·신문왕 1) 고승인 의상(義湘)대사는 꽃이 핀 자리, 천(川)이 시작되는 자리에 절을 짓고 고운사(高雲寺)라 했다. 이후 신라시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고운사의 가허루(駕虛樓)와 우화루(羽化樓)를 짓고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했다. ‘높은 구름(高雲)’을 뜻하던 고운사는 비로소 ‘고독한 구름(孤雲)’ 고운사가 됐다. 고운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조에 걸쳐 여러 번 중창됐다. 광복 이후 사찰의 재산·당우는 쇠락했지만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다.

조문국 사적지·박물관
◇조문국 사적지·박물관

의성군 금성면은 고대 국가인 조문국(召文國)의 도읍지다. 약 2천여년 전 21대 왕 369년 동안 존재했던 역사 유적지로 260여기의 고분군과 경덕왕릉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경덕왕릉 앞에는 봉분 모양의 고분 전시관에는 2009년 발굴한 대리리 2호분의 내부 모습이 재현돼있고 유구와 출토 유물·순장 문화를 통해 당시 매장 풍습을 엿볼 수 있다. 군은 2012년 10월 조문국의 역사와 유물을 체계적으로 조사·수집·전시·보존하기 위해 조문국 박물관을 설립, 2013년 4월 개관했다.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로 상설 전시장과 기획 전시실, 어린이 체험실, 수장고 등으로 구성됐다. 유물 1천500여점을 소장 중이다.


빙계계곡(빙계리 얼음골)
◇빙계계곡(빙계리 얼음골)

빙계계곡은 경북 팔승의 하나로 1987년 9월 25일 군립공원(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27호)으로 지정됐다. 얼음 구멍과 바람 구멍이 있어 빙산이라 하며, 그 산을 감돌아 흐르는 하천(川)를 빙계라고 한다. 이 동네는 빙계리로 부른다. 빙계계곡은 삼복 때 시원한 바람이 나오며 얼음이 얼고, 엄동 설한엔 더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신비의 계곡이다. 계곡 안쪽에 자리한 빙산사지 오층석탑(보물 제327호)은 높이 8.15m의 대형탑이며, 통일 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빙계리 일대는 경사면에 쌓인 암괴들이 만든 희귀한 자연현상을 보인다.

◇금봉자연휴양림

금봉산 자락의 청정자연 휴식 공간인 금봉자연휴양림은 2004년 조성됐다. 분수와 무지개다리를 관망할 수 있는 팔각정과 휴양림을 감싸고 있는 6.4㎞의 등산로 코스와 7.4km의 청석골 산책로·시화산길, 단거리 산책로 등이 꾸며져있다. 휴양림 내는 통나무산막과 휴양관, 복합수련관, 야영데크 등이 설치돼있다. 통나무산막은 참나무·소나무·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 다양한 식생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봄이면 꽃길, 여름이면 푸른 숲길, 가을이면 단풍길, 겨울이면 아늑한 눈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구한말 일본의 국권 침탈기도에 항거한 의성지역 의병들의 활동상을 기록한 ‘병신창의기적비’(丙申倡義紀績碑)


의성=김병태·김지홍기자
사진=전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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