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사색당쟁 폐해를 돌아보다
400년 전 사색당쟁 폐해를 돌아보다
  • 이재춘
  • 승인 2017.10.2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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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영양서 ‘산택재 권태시 학문과 사상’ 학술대회
권력투쟁 몰입 탐관오리 질타
피폐한 백성의 삶에 탄식
수차례 ‘돌직구 상소문’ 올려
산택재 권태시(1635~1719)의 ‘돌직구’ 상소문 등 민본주의와 애민사상을 되새기고 400년 전 사색당쟁을 반추, 현 세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살펴보는 학술대회가 영양에서 열린다.

성균관유도회경북본부(회장 안승관)는 27일 오전 영양군 문화센터에서 ‘산택재 권태시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학술대회를 갖는다.

박영호 경북대 교수를 좌장으로, 김은종 고려대 교수와 신도환 안동대 교수가 ‘산택재 선생의 임관(任官)기 상황에 대하여’, ‘산택재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라는 주제로 각가 주제발표를 한다. 이어 김세중 연세대 교수, 이성호 성균관 한림원 교수, 강일호 성균관유도회 부회장, 김명균 교남문화 대표 등 석학들이 토론에 나선다.

성균관유도회 김시덕 사무처장은 “산택재 선생은 고을원으로서 백성을 위해 군주와 대신들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는 공복이었다”면서 “당리당락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반면교사의 시대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 대곡, 문해문중 산택재 권태시의 ‘돌직구 상소문’은 최근 문중에서 산택재 문집을 번역, 국역본을 발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55세의 나이로 늦깎이 고을원이 된 그는 부임하자마자 탐관오리들이 권력투쟁에만 몰입하면서 상대적으로 피폐한 백성의 삶을 안타까워하며 여러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당시의 사회를 “회덕현의 가난한 백성 가운데 환곡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못이겨 도망가거나 죽은 자도 부지기 수 입니다. 양반네들은 ‘돈 꿔 달랠까봐’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평민들은 ‘세금이 무서워’ 가족을 이끌고 도피하느라 읍리(邑里)가 수선스럽습니다”고 지적했다.

숙종 16년 이후엔 노론이 권력을 잡은 상황임에도 남인 출신이었던 그는 사대부를 향한 직언을 멈추지 않았다.

“백성들이 흩어진 지 오래고, 사대부집에서 재물이 있는 데도 백성들을 위하여 쓰지 않는 것은 큰 도적놈이 아니겠소이까. 바로 그 백성들의 피해가 벼슬아치에 그치지 않고 결국 조정과 국가에 미칠 것이니 이를 어찌해야 할 일인지요”

그는 또 상소문 뿐 아니라 당시 유력한 대신들에게도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 백성들을 구할 방도를 찾았다.

“일개 고을원이 분수에 넘치게 하여 주제넘고 경솔함이 여기에 이르렀지만 이를 감수하면서 이렇게 서신을 전달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자애로우신 대감께서 조정 군신간 경연의 자리나 국사를 논할 때 이런 우려를 참작하신다면 백성들을 선처할 방도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산택재는 1694년(숙종 20년) 당쟁 중단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여러본 올렸으나 뜻이 관철되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 학문에만 전념했다. 회덕현감 재직당시 수령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목민관 지침서 ‘거관요람’은 나중에 그의 증손자 권방이 친구인 다산 정약용에게 보여 주면서 ‘목민심서’ 집필의 기초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양=이재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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