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950년 6월'> 6.선생님 시집가던 날(3)
<소설 '1950년 6월'> 6.선생님 시집가던 날(3)
  • 대구신문
  • 승인 2009.08.2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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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선생님은 다시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나는 텅 빈 선생님의 방을 기웃거리다가 돌아서며 애꿎은 정길이 집 똥개 배때기를 차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이 음력 삼월 초닷새라…) 나는 여느 때처럼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척 하면서 집을 나와 강 건너 과수원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금호강 다리를 건너 영순이 집 과수원 앞을 지나면서 흘깃 보니 일본사람이 심었을 성 싶은 벚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했고 영순이가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오고 있는 것이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얼핏 보였다. 뒷모습만 보고 도나를 알아본 영순이가, “호진아, 너 학교 안가고 어데 가노, 오늘 학교 안 올거가?” 하고 울음이 묻은 말로 물었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다 뒤돌아 서서, “오늘 급한 볼일이 있어서 학교에 못간다.” “무슨 볼일인데?” “니는 알 거 없다.” `너 미국유학 간다며, 나도 같이 가면 안되나?” “미국유학 가는 기영천장에 장보러 가는 긴줄 아나, 아무나 따라 나서그로…” 하고는`호진아, 호진아’ 하는 다급한 목소리에도 뒤돌아 보지않고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목욕탕 술래잡기 사건 이후부터 나는 영순이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신랑각시가 되기로 하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부담을 갖지 않았으며 점점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영순이는 너무 포시랍게(귀하게) 커서 그런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했고 특히 장래 신랑
감인 나를 깍듯이 대하지 않고 다 른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사로 대하면서도 내가 다른 여자아이들과 예기라도 나누면 눈을 흘겨보는 것이 나는 영 못마땅했으며 또 우리엄마가 여러 가지 면에서 영순이 엄마보다 처지는 것도 꺼림직했다.

나에게는 오로지 우리 선생님뿐이었다.

단걸음에 선생님 본가에 당도해 보니 커다란 차일(천막)아래 손님들이 북적거렸고 군용 찝차와 검은 다꾸시도 두 대나 보였다.

선생님은 활옷을 입고 분 바르고 연지 찍고 족두리를 쓰고 있었으며 나를 보는 순간 흠칫 놀라는 눈빛이더니 이내 엷은 미소를 띠어 보냈다.

사모를 쓰고 관대를 한 신랑의 얼굴을 보자나는 그만 온몸이 굳어지는 듯 했다.

“아니 저자슥이…”일선으로 간다던 최중위바로 그 자식이었다.

(저자슥이 기어이 우리 선생님을…) 속에서 열화가 끓어 올랐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아이고 오줌싸개 급장 도련님이 오셨구나, 일로 온느라, 국밥은 묵고 떡은 싸가지고 가거라.” 하면서 내 손을 잡아 끌었으나 나는 이를 뿌리치고 뛰쳐나와 마구 달렸다.

전신에 맥이 빠지고 하늘이 노오랄 즈음 산모퉁이가 나타났다.

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쉬었던 풀밭에 풀썩 주저 앉으니 황소울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한참을 울면서 앉아 있는데 저만치 자전거소리가 나더니 중머슴이 술통을 싣고 오는 것이 보였다.

내 앞에서 멈추더니, “니 와 여기서 울고있노, 오늘 선상님 시집가는 거 니 모리나, 우리집에 가자, 찌짐도 마이있고 떡도 마이 있다.”“이 씨발눔아 니나 마이 처묵어라.“ 하고는 발길로 자전거를 냅다 찼으나 자전거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만 발을 움켜잡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는 중머슴의 뒤통수를 향해 몇 번이나 돌팔매질을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나는 선생님 집 과수원을 내려다 보며 울다, 그치다를 거듭하다가 허기가 져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나는 딱 한번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 학교 운동장에 온갖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꽃 가마가 한대 놓여 있었고 우리 선생님이 흰 웨딩드래스에 하얀 도라지 꽃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우리 반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검은 연미복을 입은 나와 함께 이별의 왈츠를 추면서 내 손에 이끌려 꽃 가마에 오르자 가마가 저절로 훨훨 날아 올라 학교 위를 한 바퀴 돌더니 서쪽하늘의 저녁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렸다.

나는 목이 메이도록 선생님을 부르며 뛰어가다가 우물가에 있는 호두나무에 이마를 부딪혀 피를 흘리며 그만 눈을 뜨고 말았다.

바람결에 들으니 우리 선생님과 최중위는 전쟁 이전에 서울의 어느 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할 때 연애를 했던 사이며 선생님은 폐결핵중증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고 최중위도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라 서둘러 혼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나는 다시는 선생님을 보지 못한 채 검둥이 아저씨가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리 며밤마다 꿈속에서 도라지 꽃을 찾아 물더미의 절벽을 헤매고 다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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