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강낭콩 팥 섞어 가마솥에 푹 삶은 밀밥을
이웃과 나눠먹고 나면 어머니의 여름 순순히 지나갔다
넓적한 공책에 소용할 간격만큼 선을 그어놓고 써내려간
서가탄(석가탄) 100원
달갈(계란) 1판
도꾸리(티셔츠) 1300원
둘째 랜드로바
연필로 침 묻혀 띄엄띄엄 꾹꾹 눌러쓴 어머니의 가계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끼득끼득 웃어대는 딸들에게
망할 것들, 그래도 모산동*에서 딸을
초등학교 졸업시킨 사람은 우리 아버지뿐이라며
6.25 때문에 학교를 다 못 다녀서 그렇지 한다
끓는 마음 내리지 못한 체
말라비틀어진 무우말랭이 소쿠리에 퍼 담다가
에이 스트롱(스트레스)받쳐 죽겠다고
어머니 입에서 영어도 터졌다
초토화, 상황 종료
*경북 군위 우보면에 위치
◇이필호 = 1959년 경북 군위 출생
2010년 ‘사람의 문학’ 등단
옻골문화제 대상 수상
<해설> 한국의 어머니 선은 늘 가늘게 쓰여 있다. 투박할 것 같아도 투박하지 않은 것은 그게 어머니 마음이기에 그러하다. 시골의 궁핍함을 그 가는 선에 다 요약했으니 말이다. 비록 받침 맞지 않는 삐뚤삐뚤 쓴 글씨이더라도 더 정감이 가는 것은 거기에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 연의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저 해학의 비장미…. -제왕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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