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에 올라간 연명의료법
산꼭대기에 올라간 연명의료법
  • 승인 2018.02.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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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둥(마크원외과 원장, 대구시의사회 공보이사)


2018년 2월 4일부로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시범 사업을 마치고 본격 시행됐다. 이 법이 의도한 바는 바람직했다. 말기 암 환자들이나 더 이상 적극적인 연명치료가 의미없는 말기 중증 질환자들에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지속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재정적 낭비를 줄이기 위하여 진료현장에서 발생하는 법적 책임문제를 명확히 해주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국회와 정부부처에서 이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제 현장의 전문가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의료진들과 보호자들의 애로점을 해소해 주려는 당초 취지가 무색하게도 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는 시각으로 법을 만들고 수정을 반복하다보니 정작 최종 결과물은 말 그대로 산꼭대기에 올라가 버린 것이다.

일단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겠다는 환자 본인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법적인 서류를 ‘연명의료계획서’라고 하는데 자그마치 그 분량이 A4용지 43쪽이나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이제 곧 죽음을 앞둔 이에게 무슨 보험 약관마냥 오만가지 경우의 수를 늘어놓은 43장 짜리 서식을 들이밀고 서명을 받으라는 것이다. 현장의 실천 의지를 묶어버리는 대표적인 처사다.

그리고 말기 중증 환자들은 갑자기 생체징후가 나빠질 때가 많기 때문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할지 말지,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할지 말지 급하게 결정해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미처 연명의료계획서에 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경우에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했다는 사전의향을 환자 가족 2인 이상의 일치하는 진술을 통해서 확인하도록 되어있는데 만약 다른 가족 중 1인이라도 그 진술이 다르다면 이마저도 법적 효력이 없다.

또 있다. 앞서 언급한 사전의향 조차도 확인되지 않은 경우(현재로서는 대부분의 환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 환자 가족 전원이 합의를 해야 연명의료중단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고 되어있다. 환자가 갑자기 의식이 없는 경우라는 의미는 당연히 급박한 응급 상황이다. 그 응급한 와중에 전 가족의 ‘가족관계증명서’를 확인해야함은 물론이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연락이 닿지 않는 가족이 1명이라도 있다면? 또는 10명의 환자 가족 중 9명이 찬성하고 1명이 반대를 한다면?(특히 연로한 환자들이 대부분인 걸 감안한다면 가족관계증명서에 적힌 직계 존속들의 숫자가 더 많을 때도 많을 것이다) 그들 모두의 동의를 받지 못한다면 의사들은 법을 지키기 위해 9명에게 “치료비 못내!”라는 항의를 받아가면서 연명치료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주치의가 정황을 유연하게 판단해서 중단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상황을 어긴 의사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뿐만 아니라 7년간 의사면허 정지를 당한다. 그 외에도 저 복잡한 법 조항 군데 군데에는 각종 벌금과 과태료 부과에 대한 벌칙 조항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 쯤 되면 법적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이 법이 의도했던 바는 온데간데없다. 이쯤되면 독자 여러분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도데체 저런 산으로 올라가버린 법이 왜 실행에 옮겨진건지? 법안이 발효되기전 3개월간 서울대 병원을 비롯한 의료기관들에서 행한 연명의료 시범사업을 실시했었다. 그 결과를 보면 8300여명의 말기 및 임종기 환자들 중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한 경우는 107건(1.3%)에 불과했다. 이것만 봐도 연명의료법 시범사업은 실패였다. 의료현장의 복잡한 상황을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현장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이고 배려했어야 했다.

미국과 같은 기독교문화권에서도 ‘연명의료계획서’에 해당하는 법적인 서식은 2쪽 밖에 되지 않는다. 환자의 심중을 최대한 배려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43쪽이다. 환자를 배려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의사관련 윤리지침은 45장이다. 의료진의 윤리적 판단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사관련 지침은 단 1장이다. 대신 벌칙만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늘려놨다. 윤리는 됐고 법을 어기면 벌을 주겠다는 징벌주의의 결과물이다. 국민들과 의료진을 잠재적인 범법자로 대하면 이렇게 산으로 올라가는 법들이 버젓이 발효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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