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작품, 대구 품으로 돌려놓는게 내가 할일”
“아버지 작품, 대구 품으로 돌려놓는게 내가 할일”
  • 남승렬
  • 승인 2015.02.25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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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화백의 장남 이채원 이인성기념사업회장

日서도 인정 받은 천재 화가 아버지

경찰 총에 맞아 38살 젊은나이에 요절

남긴 작품들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어

아들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 지어놔

잊혀져가는 작품 복원코자 바쁜 아들

미술재능 접고 생계 위해 기계공학 전공

탄생 100년 대구전시, 서울의 절반 수준

기념전 작품 운반하다가 훼손되기도

근대의 유물 더 이상 방치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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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이인성기념사업회장이 대구 근대골목투어 코스인 이상화 고택 인근 골목길에 그려진 벽화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이상화와 이인성 등 대구가 배출한 예술인들과 관련된 컨텐츠 발굴에 대구시 등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드디어 오늘 정오에 종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그 종소리는 저 멀리까지 퍼져나갈 것입니다. 많은 축하객님의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함께 동행 못 하신 분들을 위하여 사진 몇장을 올립니다. 이제 다시 살아 돌아온 천재에게 또다시 쏘아서는 안됩니다.”

사단법인 이인성아트센터 대구본부가 개소식을 연 지난 11일 오후 9시 20분께 ‘이인성기념사업회’ 이채원 회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채원 회장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불세출의 천재 화가 이인성(1912-1950)의 아들이다. 이채원 회장을 논하기 위해서는 천재 화가 이인성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살펴봐야 한다. 청정(靑汀) 이인성. 이중섭과 더불어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시대는 그에게 ‘조선의 고갱’이라는 최고의 수식을 선사한다.

◆조선 화단 수놓은 천재, 총탄에 스러지다

이인성은 조선 화단의 귀재로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다. ‘이인성양화연구소’를 통해 후배를 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 이 천재 화가는 수채화로 독특한 자기 표현양식을 확립했다. 특히 강렬한 필법과 치밀한 공간 구성능력, 토속적인 색조미로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미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천재성은 10대 시절부터 발현됐다. 열일곱 나이에 당시 최고 권위의 화가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시작으로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고,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 최연소 추천작가에 선정되는 등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수채화와 유화뿐만 아니라 한국적인 인물상 정립 등 근대 한국화단에 향토적인 서정주의를 정착시켰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같은 이인성의 천재성은 바다 건너 일본에도 전해졌다. 요미우리신문은 1932년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의 천재성을 조명하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한때 이화여자대학 미술과에 출강, 후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요절(夭折), 세상 모든 천재들의 숙명일까. 더 많은 작품을 남겨 한국 미술계에 선 굵은 획을 더 많이 그어야 했던 이인성이, 그토록 사랑했고 자신의 화폭에 남기고 싶었던 조선의 풍경과 함께 호흡했던 시간은 38년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의 화마가 조국 산천을 뒤덮던 1950년 11월 4일 늦은 밤, 이인성은 자신의 집이 있던 서울 북아현동 인근에서 술에 취해 귀가하다 검문 중이던 경찰과 시비가 붙었다.

그는 누구냐고 묻는 경찰관에게 “자신을 몰라보느냐”고 큰소리를 쳤고, 경찰은 거물급 인사인 줄 알고 그대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잠시 뒤 동료로부터 이인성이 화가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경찰관은 이인성의 집으로 달려가 총을 쐈다. ‘조선의 고갱’이라 불리던 천재 화가 이인성은 38세의 나이에 그렇게 어이없이 세상과 이별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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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이상화 고택 앞에서 포즈 취한 이채원 회장.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 최인호는 1974년 6월 5일자 한국일보에 기고한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이인성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했다.

‘(전략) 해방된 조국에서 기쁨에 술 취해 돌아오던 이인성은 같은 동포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그렇게 죽었다. 그 손끝이, 그 손끝에서 나온 그림이, 일본인의 눈을 놀라게 했던 이인성의 마술적 재능이 총 한방에 죽고 말았다. 자신을 서슴지 않고 천재라고 표현하던 이인성이 통행금지에 걸려 죽었다. 환쟁이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이십년이 흘러간 지금 그의 그림은 남아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천재의 재능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후략)’

허무한 죽음을 맞은 이인성 화백은 천재이기 전에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자 아버지였다. 현재 이인성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이채원 회장이 이 화백의 장남이다.

이 회장은 현재 대구 북구 산격동에 이인성아트센터 대구본부 개소하는 등 대구가 낳은 천재 화가 이인성의 흔적을 복원하고 그의 천재성을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특히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잊혀진 천재 화가 이인성의 복원을 위해 바쁜 행보를 취하고 있다. 다음은 이 회장과의 일문일답.

- (사)이인성아트센터 대구본부가 문을 연 지난 2월 11일 오후 페이스북에 쓴 글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이제 다시 살아 돌아온 천재에게 또다시 쏘아서는 안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남기기도 했는데 그 의미가 궁금합니다.

= 제 아버지인 이인성 화백은 1950년 11월 한발의 총성으로 그림 속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화백께서는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탄생 후 100년이 지난 2012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전 3개월 전시를 계기로 그 분의 작품 80점을 처음으로 만나게 됐고, 순회 전시를 통해 대구시립미술관으로 드디어 귀향하는 전시를 갖게 됐습니다. 그 분의 작품이 대구를 떠나 다시 대구로 돌아오기까지는 어언 7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대구 순회 전시에서는 서울 전시의 반쪽인 40점만 출품됐습니다. 시민들은 대구 순회 전시가 이렇게 반쪽 전시로 전락된 사실을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이같은 사실은 대구 어느 누구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게 현실이 됐고 관심 밖의 일이 됐습니다. 다시 페이스북 그 문구로 돌아가 설명하면, 2012년 그 분의 작품이 대구에 전시됐다는 것을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으로 표현했고 반쪽 몸, 즉 작품 40점만이 출품됐기에 이번에는 그를 또 쏘아서는 안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2012년 대구 순회 전시가 진행될 때 저는 아버지의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대구에 가져오겠다는 의지로 일인시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또 무관심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구지역 한 일간지 기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고, 그 결과 아버지가 남긴 ‘사과나무’가 다시 대구로 돌아오는 계기가 됐습니다.

아버지는 서울 북아현동 당신의 자택 마루에서 경찰이 쏜 총에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게 혼란한 전쟁통이었고 사람들은 이인성이 죽은 지도 잘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전쟁은 3년 동안이나 계속 됐습니다. 이같은 전쟁 상황 속에서 그 분이 남긴 작품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 의문을 푸는 게 바로 이인성 복원의 첫걸음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 부분에 대해 속 시원한 해법을 제시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제 그 걸음의 첫 발을 떼려고 합니다.

- 이인성아트센터 대구본부의 앞으로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향후 어떤 사업과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입니까.

= 2022년이 이인성 탄생 11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탄생 110주년을 맞아 서울과 동경에서 순회 전시회를 열 계획인데, 이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인성의 그림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사업입니다. 이인성의 작품은 결국 대구시민의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그 작품들이 어디에 어느 정도 있는 지 저도 잘 모릅니다. 문제는 이인성의 작품이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례로 지난 2012년 100주년 탄생기념전을 준비할 당시 작품을 운반하다가 훼손된 일이 발생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근대의 유물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차후 작품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에 이인성의 작품을 지킬 수 있는 사업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최근 대구시와 삼성그룹이 조성한 대구창조경제단지 내 삼성문화센터의 미술관을 이인성기념관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대구시와 삼성 등에 건의할 계획입니다. 새로운 미술관을 설립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기 보다는 기업의 자체적인 미술관을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특히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 중인 아버지의 작품을 삼성문화센터 미술관에 전시하는 방안도 삼성 측에 요청할 계획입니다. 이밖에도 대구근대골목 투어 등과 연계한 ‘이인성 문화투어’, ‘이인성 사과나무길’ 조성 등도 관계기관과 협의해 진행할 것입니다.

- 이인성 화백에게는 ‘조선의 고갱’, ‘비운의 천재 화가’라는 수식이 늘 붙습니다. 천재 화가 이인성이 아닌, 아버지 이인성에 대한 기억이 궁금합니다.

= 태어난 지 50일만에 아버지를 여의였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학생들에게 “아들을 낳으면 ‘채색 채’자에 ‘동산 원’, 채원이라고 이름을 지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저는 이채원이란 이름보다 ‘이인성의 아들’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 이인성의 아들로서 그를 대구의 품으로 돌려주는 게 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의 천재성, 미술 쪽으로 닮은 분야가 있습니까? 대학에선 기계공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초등학교 시절에는 한국일보사 어린이 사상대회에서 입선도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 활동을 했으며, 미화부장을 연달아 맡았습니다. (웃음) 그러나 가계를 이끌어 갈 집안의 가장으로서 대학 전공은 취직이 잘되는 기계공학과로 택했습니다. 졸업 후 기계설계 사무실과 현대건설에서 근무를 하고 전문건설업을 하며 이인성기념사업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이인성 화백이 남긴 작품 가운데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아버지가 제작한 모든 그림이 다 자식인데 모두 소중합니다만, 2012년 전시회 때 훼손된 작품이 안타깝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렇게 훼손되고 망가져 가고 있는 작품들을 지켜야 합니다.

남승렬기자 pdnamsy@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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