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깊이
풍경의 깊이
  • 승인 2020.11.09 21: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현숙 시인
출가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느냐고 물으니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말라며 서슴없이 대답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텅 빈 듯하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열매며 잎들을 모두 떨구어내고 빈 몸으로 서 있는 마당 가, 감나무 한 그루가 남의 일 같지 않은 늦가을이다.

“어젯밤 꿈에는 네가 나왔다. “잘 지내?”라고 차마 묻지 못했다. “잘 지내.”라고 서슴없이 대답할까 봐. 누구보다 네가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이렇게나 나쁘다. 꿈속에서도 나아지지 않는다.” 오은 시인의 ‘표리부동’이라는 시가 내 맘에 떨어져 나려 뭉근한 위로가 된다. 설혹, 잘 지내지 못해도 묻는 이를 배려해 서슴없이 잘 지낸다고 말할 때가 있는 것처럼 어떤 조심스러운 마음이 쉽사리 안부를 있는 그대로 전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리라.

이중적인 마음이다. 바닥으로 툭툭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감잎들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낙엽이나 자식처럼 한 우주가 우리에게 왔다가 갔는데 어떻게 아무런 흔적이 없을 수 있을까. 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진심이지만 잊지 않고 조금은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어쩔 수 없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큰딸이 빠져나간 빈방에 가만히 앉아 본다.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구석구석 텅 비어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공허가 방안 가득 채워진다. 여행 떠나기 전날 가방을 싸듯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이 방 저 방 빈방들을 곰곰 헤집고 다닌 지 수십 분째 끊임없이 밀려갔다 밀려오기를 반복하는 파도처럼 후회가 인다.

삶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내일을 기대하고 살았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데 게을렀고, 미안하다 말 한마디 건네는 일에 인색했다. 가진 것에 만족을 느끼기보다 더 가지지 못한 것들로 인해 불만을 토로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자식을 출가시키고 나면 그제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하더니 마지막 짐을 딸내미 손에 들려 보내며 비워냄으로써 채워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명줄을 놓아버린 생의 마지막 육신이 삼베보자기에 싸여 마무리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강보에 단단하게 싸매진 채 세상에 첫발을 내딛듯 마무리도 보자기에 싸여 끝맺음 하는 것이다. 수도승이 출가하는 마음으로 보따리를 싼다는 건 현재의 삶을 바꾸고 싶다는 강한 열망일 것이다. 지금의 이곳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거나 변화에 대한 동경은 아닐까 싶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를 노래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처럼 계절을 견뎌온 시간이 참으로 위대하다. 입동절기가 지나서였을까. 가을이라기보다는 겨울이라는 말이 오히려 더 실감난다. 지루하고 뜨거웠던 만큼 가을의 문 앞을 서성이는 바람이 신의 전령처럼 신선하고 애틋하다. 나는 며칠 얻은 일탈을 즐기기 위해 ‘가방’을 싸기로 한다. 가방 앞에 앉는다. 가방 속은 삶의 내용을 은유한다.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다 보니 ‘가방을 싸고 푸는 과정’이야말로 수많은 사연을 담게 되는 삶의 서사가 아닌가 싶다. 결국 인간은 ‘가방’에 어떤 내용물을 넣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내게 부여된 단 하루의 짧은 여행이 생의 마지막 보따리를 싸는 것이라면 어떨까. 주변을 세심하게 둘러본다. 책만 잔뜩 싸 짊어지고 갔던 여행길에서 그것마저도 욕심이었으며 부질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은 책 속 세상처럼 갇혀 있지 않았다. 또 다른 세상으로 펼쳐진 풍경과 색다른 향기들 그리고 나뭇잎처럼 다양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로 한껏 펼쳐져 있다. 내 눈앞의 모든 풍경이 내 생애 깊이를 더하는데 충분하다. 여행을 통해 한 아름의 ‘행복 보따리’를 마음에 새겨 넣는다. 내 인생의 ‘가방’은 보다 더 풍성해질 것이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