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보는 게 아니라 ‘읽을 줄 알아야’ 했다
그림, 보는 게 아니라 ‘읽을 줄 알아야’ 했다
  • 윤덕우
  • 승인 2020.11.1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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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온의 민화이야기] 노안도(蘆雁圖)
발음의 유사함으로 읽다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그림
노안의 발음이 老安과 연관
노년의 안락함 기원하는 뜻
한나라 백과 전서로 읽다
먹이 찾아 남쪽으로 간 기러기
회귀 때 그물에 낚이지 않으려
갈대 물고 가로로 날았다고 해
갈대 물다=보신책을 강구하다, 노년의 신중한 처신으로 통용
가을이 깊어져 이제 슬슬 월동 준비를 해야 한다. 예전에 어머니들은 겨울 채비로 연탄 몇백장 쌓아놓고, 김장 백 포기 하면 든든하게 겨울을 난다 하셨는데 가을이 깊어지면서 겨울 채비로 우리나라로 날아든 철새들을 보면서 올겨울 큰 추위나 큰 화재 없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노안도(蘆雁圖)를 소개하고자 한다.

노안도(蘆雁圖)는 갈대 노(蘆)와 기러기 안(雁)을 일컫는 것으로 말 그대로 갈대와 기러기가 등장하는 그림이다. 노안도(蘆雁圖)의 노안을 노안(老安)과 발음이 같아 노후의 안락함을 기원하는 그림이다.

조선 초기 안견부터 신사임당. 그리고 장승업이나 안중식 등 근대화단의 대표 화가들까지 이러한 의미로 선물용 그림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원래 기러기는 풀이나 풀씨, 낟알 등을 먹는 초식 조류로서 논이나 해안 습지 주변의 갈대밭에서 생활함으로 갈대와 기러기의 조합은 그리 낯설지 않다. 기러기는 겨울 철새로서 가을 저녁이면 무리 지어 하늘을 나는 모습이 만추의 상징으로도 TV에서도 자주 보이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노안도라는 제목을 보고 “갈대 밭에 앉은 기러기”라고 읽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독화법(讀畵法에) 의해 그림이 글자 대신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러기와 갈대가 나란히 있거나 앞뒤로 있어도, 또는 기러기가 갈대를 입에 물고 있어도 모두 ”노안도“가 되는 것이다. 기러기와 갈대 이 둘 사이에는 주종관계가 없으므로 서양화의 동물화처럼 기러기가 주인공이고 갈대가 배경이라고 볼 수 없고 그 두 가지는 화면 내에서 동격의 가치를 갖는다. 독자들은 기러기와 갈대를 그린 그림을 보고는 도저히 ‘편안한 노후생활’이라는 그림의 뜻을 유추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그림이 아닌 동양의 그림에서만 알 수 있는 그림을 읽는 방법이다.

그 방법으로는 첫 번째로, 그려진 사물을 동음이자(同音異字) 의 문구로 바꾸어 읽는 방법. 두 번째, 그려진 사물이 갖고 있는 우화적 의미(寓話的意味)를 그대로 읽는 방법. 세 번째, 그려진 사물과 관련된 고전적 문구(古典的 文句)를 상기하여 읽는 방법이 있다

노안도는 세 번째 방법으로서 바람을 가르며 제일 앞서 나는 대장 기러기가 갈대를 입에 물려는 순간이다.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나는 것을 함로이자방(銜蘆以自防), 함노안(銜蘆雁), 함로(銜蘆)라고 하는데 <회남자(淮南子)>.(기원전 2세기 한나라 초기의 백과 전서)에 나온다. 옛날 중국에서 기러기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양자강 남쪽으로 날아올 때는 북쪽에서 잘 먹지 못 했기 때문에 몸이 말라서 하늘을 높이 날아오지만, 봄에 다시 날아갈 때는 남쪽에 있는 동안 살이 쪄서 높이 날지 못했다. 이것을 이용해서 어부들은 그물을 쳐서 기러기를 사냥하였다고 하는데, 한편 기러기들은 이 그물에 걸리지 않기 위해 갈대를 꺾어 가로로 물고 날았다고 한다. 그래서 “갈대를 물다”라는 말이 보신책을 강구 한다는 뜻, 신중하게 처신한다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

서양 그림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뜻과 형상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또 새로운 정보로 이해하면 신선하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새들 중에 왜 기러기를 이렇게 대접 했을까?

예로부터 이런 기러기를 보고 그림도 그렸지만,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르기를 좋아했다.

조선 후기 일상 속 여인들의 지혜를 담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따르면 기러기는 네 가지 덕목을 갖춘 새로 묘사되고 있다.

“추우면 북으로부터 남형 양에 그치고 더우면 남으로부터 북안 문에 돌아가니 신(信)이요, 날면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답하니 예(禮)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요,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잠을 자되 한마리는 경계를 하고, 낮이 되면 입에다 갈대를 머금어서 그물을 피해 가니 지혜(智惠)가 있다“고 평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기러기의 덕성을 본받아 혼례식에서도 신랑이 기러기와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갔다. 이때 기러기를 나르는 사람을 ”기럭아비“라 불렀다. 처음에는 살아있는 기러기를 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 기러기로 바뀌었으나. 신의로서 부부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그 의미는 그대로 지금까지 전달되고 있다.

자 이제 기러기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 근대 대표적인 화가인 안중식의 노안도 이다.
 

안중식의노안도
안중식작/노안도 /견본담채/ 157.3x 67.2 cm /1900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중식이 그린 ‘노안도(蘆雁圖)에는 서정성이 푸근하게 담겨있다. 기러기 가족이 갈대 하늘거리는 수초 밭에 안착한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내려와 푸르른 달무리를 이룬다. 부리를 벌리고 소리치는 기러기들은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는데, 단잠에 빠진 녀석은 눈꺼풀이 까무룩 내려앉았다. 날개에 묻은 먹색은 짙고 연한 변화를 드러내고 갈대꽃에 젖은 하얀 색은 달무리에 번졌다.

그림 속에 화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푸른 잎 늘어지고/ 높고 낮은 구름이 저녁놀에 물드네/ 달빛 가장 밝으니 가을밤 길기만 한데/ 기러기 울음소리가 강남에 먼저 이르네.’ 기러기 무리는 먼 길을 갈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짖으며 응답한다. 울음소리는 지친 짝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응원가다. 그 소리에 담긴 추임새가 있어 따뜻한 강남이 멀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로 다독이고 위로해주는 기러기 가족의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

기러기는 가족처럼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이동을 한다. 장승업의 노안도처럼 말이다.
 

장승업-노안도-10폭병
<그림2> 장승업 작/노안도 십폭병/ 지본담채 /144 X 41.3 cm /1886년작 /개인소장

열폭병풍에 담긴 기러기 예순 마리가 금방이라도 먹빛 깃을 치며 병풍 밖으로 튀어나올 듯 하다. 2008년최초로 일반에 공개된 조선 화가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걸작 노안도(蘆雁圖) 십폭병(十幅屛)이다. 장승업은 기량이 절정에 오른 만 43세에 그린 것으로 큰 붓에 먹과 안료를 찍어 종이 위에 일필휘지 휘둘렀다. 붓질 한번 할 때마다 기러기 한 마리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고, 강물을 향해 곤두박질하면서 종이 위에 살아났다. 장승업은 기러기를 자세히 스케치하듯 그리지는 않지만, 기러기의 생태적 특성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민화-노안도-02
작자미상/노안도/견본수묵/29.7X26.5/19세기 말 제작으로 추청 / 호암미술관 소장

민화의 노안도는 ”함로(갈대를 물다)“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 말기로 오면 엄격하던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양반들은 중심으로 지켜지던 유교적 가치가 일반 백성들까지 전파되면서 미술작품의 뜻이나 시(詩), 문체보다는 그림 자체에 더 집중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문자와 글자를 잘 몰라도 그림 속에 담겨진 의미를 전달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기러기가 애써 목을 늘여 갈대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난세에 보신책을 강구한다.’는 노안도의 의미가 ‘편안한 노후생활’이라는 현실적 요구와 부합하면서 동시에 그림만으로도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노후의 편안함’은 과연 무얼까?

보험을 들고, 연금을 받고, 저축한 돈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사는 것이 안락한 노후생활일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예상보다 너무 오래 살고 있고,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버렸다. 자녀들은 모두 떠나고 늙고 병든 몸에 어려운 경제 상황은 노인들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이다. 어떤 노인들은 일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고, 어떤 노인들은 오래 사는 일이 가장 소원이라고 한다.

이제 옛날 그림의 노안도나 TV 광고에 나오는 모습처럼 이상적인 노후생활은 없는 것 같다.
 

장승업-노안도-10폭병
심규섭 작/노안도/ 디지털 회화/ 2012년작 / 개인소장

심규섭의 오늘날의 노안도를 보시라. 옛 그림에서 어딘가 안착하던 기러기는 보이지 않고 죄다 하염없이 하늘을 날고 있다. 이 그림의 의미는 노인이 되어도 여전히 열심히 날고 있다는 뜻인가! 이제는 노인이 되어도 고달프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사실 어릴 때도, 젊었을 때도, 중년이나 장년의 삶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흔히 '중생한'이라는 말처럼 '삶이 곧 고통'이기 때문이다. 삶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과거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 다음 세대의 미래에 투자하고, 세속의 욕망을 내려놓고 자연의 순리와 이치에 따르는 것, 어쩌면 이것이 가장 편안한 노후생활이 아닐까.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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