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가 꽃눈을 뜰 때
매화가 꽃눈을 뜰 때
  • 승인 2021.01.0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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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문현숙 시인

창밖, 담장 위 고양이 한 마리가 실눈을 뜬 채 잠들어 있다. 똬리를 틀고 누워 온 몸으로 햇살 세례를 받는 중이다. 커튼을 열어젖히는 소리에 놀랐는지 덜 깬 잠을 꼬랑지에 매달고선 쏜살같이 달아난다. 아뿔싸! 커튼을 여닫는 사소한 일에도 좀 더 신중히 처리했어야 하는데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별생각 없이 습관처럼 행해진 나의 행동으로 인해 며칠 한파에 지치고 고단한 몸 겨우 내려놓고 쉬고 있었을 길고양이의 꿀잠을 깨우고 만 것이다.


새해가 왔지만 연일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가는 코로나 바람이 매섭게 불어대는 혹한의 계절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동굴에 갇힌 듯 응달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우린. 요즘처럼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때도 드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까맣게 타거나 기미가 낀다며 커튼을 쳐서 차단하거나 피해 다녔다. 햇볕이 내려앉은 자리면 집안 어디든 일부러라도 찾아 그 안에 드는 일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양지가 그립다.
 

고 신영복 선생의 책 '담론' 중 인상 깊게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갑니다.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습니다.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습니다.' 억울하고 암울한 시간을 보내던 중에도 그는 햇볕 한 줌으로 따뜻함과 삶의 감각을 느꼈다고 한다.
양력설 연휴, 며칠간의 쉼이 주어졌지만 쉰다고 쉬는 게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여행계획이라도 세워 어디로든 떠났겠지만 5인 이상 집합금지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지금 함부로 나다닐 수 없다. 집안에서만 보내야 한다. 퇴근이 없는 하루를 넘기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이 지금처럼 간절할 때가 또 있었던가.

가끔은 가족이나 주변의 일상이 성능 부실한 난로를 둔 교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까이 다가서면 온몸이 익을 것처럼 뜨겁다가도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 온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거리 두기처럼 뜨겁지 않으면 춥고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응달을 데워줄 온기가 무엇보다 필요할 때라는 걸 알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잡다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난해하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이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기 때문일까. 희망하나 둘 데 없는 불안이 점점 세력을 넓혀간다. 생각과 생각이 서로 눈치를 살피고 얽히고설키어 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엉키고 만다.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 일쑤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박준 시인의 에세이집에는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고 한다. 내 귀가 나를 가르친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타인의 말을 잘 들어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정작 귀 기울여 들어준 적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다 하지 못한 말을 하는 시간이기보다는 미처 들어주지 못한 말을 들어주는 건 어떨까. 내 귀가 나를 진정으로 성장시킬 수 있도록 귀도 열고 마음도 열어서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속속들이 다 알고 싶을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기억한다. 문득 신혼 시절,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이유였던 그때를 떠올려 본다. 어제보다 젊을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더 사랑할 수는 있다. 생각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이어지기도 끊어지기도 한다. 새롭게 시작한 한 해, 나의 말이 그를 향하기 전 한 번 쯤 되짚어 본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어제의 오해와 오늘의 이해 사이 새해가 떠올랐다. 노신의 '고향'이라는 소설의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온다.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길과 같은 것이다.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다니면서 결국 생겨난 것이다.' 새 희망이 부풀어 오른다. 우리들 마음의 사각지대에도 따뜻한 햇볕이 차고 넘치기를 꿈꿔본다. 막연하게 바라는 것들만 나열하는 희망이 아니라 사람이 다니면서 결국 생겨나는 희망, 우리의 발걸음이 새겨지고 바라는 것들이 실체가 되는 그런 희망이기를….
황금빛 햇살이 빈 가지들의 속을 켜켜이 채워 넣고 있다. 매화가 꽃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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