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놓쳐버린 틈은 없나 살피고 되돌아보는 하루의 가장자리다. 서녘으로 지는 해가 붉은 신호등을 켜 든 채 서 있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 그대로다. 세상의 모든 집과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찾아들어 온기를 더해준다. 노을이 지고 극월極月이 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좁은 골목을 들어선다. 한 집 건너 한 집, 빼곡히 들어앉은 가게마다 새어 나오는 불빛이 설렘과 불안으로 가득하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요즘 들어 하루건너 하루 개업과 폐업을 반복하며 버텨내는 중이다. 그 중, 간판을 바꾼 일 없이 한자리에서 오랜 시간 살아남아 있는 점방 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년째 애용해 온 단골 가게다. 진열된 물건들이 대형마트와 비교해 턱없이 적다. 찾는 물건들이 있는 것보단 없을 때가 더 잦다. 그런데도 그 점방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그 곳에 가야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출입문 앞까지 나와 지나치는 발길을 멈추게 하는 품목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젊은 부부가 함께 꾸려가는 곳인데 그 특별함을 더해주는 물건을 공급해 주는 이는 그들의 부모님이다. 애지중지, 자식을 키우듯 심고 다독이며 손수 농사지은 작물들이다. 자식의 삶에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햇양파, 햇감자, 햇고추, 곶감 등 모두 햇것이다. 자식에게 먹이듯 정성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 깃들어있다. 물건도 물건이려니와 포장만 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신선하고 깨끗하며 가격도 저렴하다. 때론 그들의 부모님이 들인 공에 비해 지불하는 돈이 너무 약소한 것만 같아 미안함마저 들 때도 있었다.
얼마 전, 김장을 담그기 위한 재료를 사러 갔던 날 일어난 일이다.
"미안합니다. 어머님이 늙어버려 더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태양초를 달라는 말에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떨어뜨리며 흐느껴 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방 문을 내려야 할 것 같다고도 한다. 그동안 찾아주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까지 잊지 않는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체 할 말을 잃고 돌아서 나오던 그때의 상실감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오늘 저녁은 뭐 묵을낀데?"
막냇동생이 보낸 배꼽시계의 알람이 카카오톡을 타고 흘러든다. 나 역시 딱히 먹은 것도 없는데 헛배가 부르다며 답장을 보냈다. 내가 해 주는 김치찌개를 유독 좋아하는 동생은 웬일인지 입맛이 없다며 큰언니인 내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입맛도 봄 타나 보다. 입맛이 없으면 밥맛으로라도 먹고 살아야지"
아치고절雅致高節, 꽃눈 틔우듯 동생의 허기진 마음에도 온기가 가득차길 바랐다. "엄마가 해 주는 갱죽을 먹으면 입맛이 돌아올 것 같아."
문득, 엄마표 갱죽을 다신 먹을 수 없게 되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 같은 집채만 한 불안이 들어 던진 말이다. 동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한다.
"그기 머라꼬 그렇게 먹고 싶다 카노 큰 성아"
그리움의 쓰나미가 나를 덮친다. 마음이 온통 먹장구름이 드리우듯 먹먹해 온다. 음식은 봉인된 추억을 불러내는 힘을 지녔다.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 사람들의 뼈와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는 듯 보인다.
그리움 가득 우려낸 육수에다 묵은지와 콩나물 그리고 찬밥에 엄마만의 손맛을 더해 푹 끓여내 주는 그 갱시기를 얼마나 더 먹을 수 있게 될는지 기약할 수 없다. 수타로 뽑은 면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주시던,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아버지의 손맛처럼.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 중엔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을 떠올리는 대신 이미 가진 것을 잃으면 얼마나 아쉬울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한다. 갈 수 없는 여행을 고집하기보다는 편히 쉴 수 있는 주말조차 없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아니면 감사함까진 이르지 못하더라도 다행 정도에만 머물 수 있어도 괜찮은 것이라 위로 삼아 보는 건 어떨까 싶다. 행복은 더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일이 안 생기는 것이라는 말을 더해보면서.
별일 없이 보낸 하루의 끝에 찾아온 소박한 평온에 만족해 보는 밤이다. 밤하늘에 꽃수를 놓으며 별들이 물어온다. 당신의 단골집은 안녕하신가요? 이만 총총….
집으로 돌아오는 길, 좁은 골목을 들어선다. 한 집 건너 한 집, 빼곡히 들어앉은 가게마다 새어 나오는 불빛이 설렘과 불안으로 가득하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요즘 들어 하루건너 하루 개업과 폐업을 반복하며 버텨내는 중이다. 그 중, 간판을 바꾼 일 없이 한자리에서 오랜 시간 살아남아 있는 점방 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년째 애용해 온 단골 가게다. 진열된 물건들이 대형마트와 비교해 턱없이 적다. 찾는 물건들이 있는 것보단 없을 때가 더 잦다. 그런데도 그 점방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그 곳에 가야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출입문 앞까지 나와 지나치는 발길을 멈추게 하는 품목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젊은 부부가 함께 꾸려가는 곳인데 그 특별함을 더해주는 물건을 공급해 주는 이는 그들의 부모님이다. 애지중지, 자식을 키우듯 심고 다독이며 손수 농사지은 작물들이다. 자식의 삶에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햇양파, 햇감자, 햇고추, 곶감 등 모두 햇것이다. 자식에게 먹이듯 정성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 깃들어있다. 물건도 물건이려니와 포장만 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신선하고 깨끗하며 가격도 저렴하다. 때론 그들의 부모님이 들인 공에 비해 지불하는 돈이 너무 약소한 것만 같아 미안함마저 들 때도 있었다.
얼마 전, 김장을 담그기 위한 재료를 사러 갔던 날 일어난 일이다.
"미안합니다. 어머님이 늙어버려 더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태양초를 달라는 말에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떨어뜨리며 흐느껴 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방 문을 내려야 할 것 같다고도 한다. 그동안 찾아주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까지 잊지 않는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체 할 말을 잃고 돌아서 나오던 그때의 상실감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오늘 저녁은 뭐 묵을낀데?"
막냇동생이 보낸 배꼽시계의 알람이 카카오톡을 타고 흘러든다. 나 역시 딱히 먹은 것도 없는데 헛배가 부르다며 답장을 보냈다. 내가 해 주는 김치찌개를 유독 좋아하는 동생은 웬일인지 입맛이 없다며 큰언니인 내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입맛도 봄 타나 보다. 입맛이 없으면 밥맛으로라도 먹고 살아야지"
아치고절雅致高節, 꽃눈 틔우듯 동생의 허기진 마음에도 온기가 가득차길 바랐다. "엄마가 해 주는 갱죽을 먹으면 입맛이 돌아올 것 같아."
문득, 엄마표 갱죽을 다신 먹을 수 없게 되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 같은 집채만 한 불안이 들어 던진 말이다. 동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한다.
"그기 머라꼬 그렇게 먹고 싶다 카노 큰 성아"
그리움의 쓰나미가 나를 덮친다. 마음이 온통 먹장구름이 드리우듯 먹먹해 온다. 음식은 봉인된 추억을 불러내는 힘을 지녔다.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 사람들의 뼈와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는 듯 보인다.
그리움 가득 우려낸 육수에다 묵은지와 콩나물 그리고 찬밥에 엄마만의 손맛을 더해 푹 끓여내 주는 그 갱시기를 얼마나 더 먹을 수 있게 될는지 기약할 수 없다. 수타로 뽑은 면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주시던,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아버지의 손맛처럼.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 중엔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을 떠올리는 대신 이미 가진 것을 잃으면 얼마나 아쉬울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한다. 갈 수 없는 여행을 고집하기보다는 편히 쉴 수 있는 주말조차 없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아니면 감사함까진 이르지 못하더라도 다행 정도에만 머물 수 있어도 괜찮은 것이라 위로 삼아 보는 건 어떨까 싶다. 행복은 더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일이 안 생기는 것이라는 말을 더해보면서.
별일 없이 보낸 하루의 끝에 찾아온 소박한 평온에 만족해 보는 밤이다. 밤하늘에 꽃수를 놓으며 별들이 물어온다. 당신의 단골집은 안녕하신가요?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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