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 인 아웃]'결백'... 이 영화가 여성연대를 오용하는 법
[백정우의 줌 인 아웃]'결백'... 이 영화가 여성연대를 오용하는 법
  • 백정우
  • 승인 2021.01.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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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스틸컷
영화 '결백' 스틸컷

문상 왔던 마을사람들이 농약을 탄 막걸리를 마시고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막걸리를 마신 사람은 망자와 가장 친했던 이들. 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현직 시장도 포함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죽은 남자의 아내이다. 용의자의 딸인 유명 변호사가 엄마를 변호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다. 미심쩍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누구도 나서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 분위기. 모두가 한통속인 느낌이다.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배후와 다가오는 그림자. 엄마의 무죄결백을 위해 혈혈단신 분투하는 딸이다. 이젠 조력자가 나타날 차례다. 대개는 평범하고 순진한 마을 총각이다. 파출소에 근무하는 초등학교 동창이 지목되었다. 그는 예쁘고 똑똑하고 잘나가는 서울서 온 변호사인 여자동창을 위해 헌신할 거다. 의협심과 정의감에 약간의 사적감정이 버무려지면 불의에 굴하지 않는 경찰정신이 탄생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면 ‘여성 소외’다. 지방으로 갈수록 규모가 작을수록 여성인권은 사각지대에 놓인다. 영화 속 마을 역시 가부장이데올로기가 여전하다. 이를 지탱하는 건 비밀 없는 사생활공유와 침묵의 카르텔이다. 사람 하나 죽어나가도 모를지언정 공공의 안녕과 끈끈한 정으로 봉인시키면 여자 인생 하나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

엄마의 속사정은 이렇다. 마을 남자들의 공모로 남편을 잃었고 공범 중 한 명(망자)과 살 섞으며 평생을 살았다. 절치부심했으나 갈 친정도 없고 뱃속의 자식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 남편을 잃고 갈 곳 없는 지방 소읍의 여성은 가정과 가족과 마을사람으로부터 이중삼중으로 소외 되더니 농약사건 이후엔 법으로부터 소외당한다. 엄마가 연루된 사건으로 인해 10여년 만에 고향을 찾은 딸 역시 같은 처지다. 여성의 소외를 드러내는 장치로 가부장이데올로기의 상징인 ‘장남’이 거듭 등장한다. 엄마는 틈만 나면 장남 걱정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주요 공간인 경찰서와 병원 신에서 여경과 간호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증거주의 재판에서 합리적 의심만으로 혐의를 확증할 순 없다. 정황적 증거와 사실적 증거가 혼재된 상황이니 불합리하고 석연치 않아도 증거가 없으면 유죄를 입증하기 힘든 법. 게다가 주심 판사가 여성이다. 용의자와 변호인과 재판장으로 구성된 삼위일체. 여성연대로 읽힐 수밖에 없는 이 설정은, 딸이 달려온 90분간의 악전고투를 한 순간에 무위로 만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러니까 재판장의 ‘무죄’ 주문 한방으로 다 끝내버린다는 얘기다. 애초에 유무죄를 가리는 법정드라마였던가.

개발과 자본으로 인해 무너진 마을공동체와 탐욕스런 인간의 이기심이 힘없는 여성을 어떻게 억압하고 사지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 그 과정에서 이중삼중으로 소외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던 드라마가 젠더문제로 급차선 변경할 때 벌어지는 낭패라니. 살인 주체를 여성에서 남성으로 옮기고자 90분을 소비한, 석연찮은 논리로 여성연대의 힘을 오남용한 영화가 ‘결백’이다.

영화 말미, 정말로 엄마가 무죄라고 생각하느냐는 검사 말에, 그분은 이미 충분히 죄 값을 치렀다는 항변은 적어도 법조인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가부장에게 핍박받은 지난한 세월을 일순간에 격파하는 통쾌함이 제 아무리 짜릿하다고 해도 말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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