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의 생성
욕구의 생성
  • 승인 2021.02.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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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복 영진전문대학교 명예교수 지방자치연구소장
책장 한 곳에 잠시 눈이 머문다. 누렇게 변한 책들이 수십 권 꽂혀있다. 오래된 책이지만 고서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는 민망하다. 보통 고서라고 하면 옛 선조들의 손때가 묻은 무게 있는 책을 연상하지만 내 나름의 고책은 그런 류가 아닌 그저 오래된 책일 뿐이다. 대략 70여 년 전에 발간된 것들이다. 서른 권이 넘는 책들은 하나 없이 표지가 낡고 닳아서 만지면 금방 어스러질 것만 같다. 고책들은 별다른 보관 방법 없이 그냥 책장에 꽂혀 있다. 오랜 세월, 책을 펴 본 기억이 없다. 책에 대한 모욕이다. 서재 한 구석을 차지한 고책들은 내 삶에 위로와 허전함을 채워주는 존재에 불과했다. 고교 시절, 아무 책이나 마구 읽고 책장을 장식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당시, 대로변 양지바른 길목에는 길거리 책방이 있었다. 주인은 큰 돗자리 위에 리어카에서 내린 많은 책들을 아무렇게나 펴 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책을 정리하지 않고 누구나 이 책 저 책을 자유롭게 고르게 하는 것은 그의 독특한 장사 방법이다. 어른들이 따로 찾는 책들도 있었지만 문학서가 대종이었다.

나는 길거리 책방의 단골이었다. 간단히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책 고르는 재미도 있었고 책값도 헐했다. 길거리 책방 이곳저곳에서 한두 권씩 사 모은 것들이 지금까지 내 서재를 장식하고 있다. 가끔씩 고책들에 눈을 주면 독서삼매경 讀書三昧境에 빠졌던 내 소년시절이 파노라마로 다가온다. 책은 내 삶의 일부분과 겹친다는 생각을 한다. 고책에 얽힌 이야기다. 김진섭의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은 내게 특별한 책이다. 중·고교 때 구입한 것으로 기억된다. 고려인쇄소란 곳에서 4288년 9월 20일 발간되었다. 66년 전 것이다. 책 맨 뒷장에는 옛 책 소유자의 이름이 있다. ‘순애에게’라고 쓴 글씨를 보면서 문학청년이 여친에게 준 책이라는 감을 잡는다. 여친은 그 책을 왜 헌책방에 팔았을까. 아련한 마음이 교차한다. 세로로 인쇄된 이 책은 한글보다 한자가 더 많다.

글의 주제를 보면 작가 김진섭은 여러 안목으로 글을 쓴 것을 발견한다. 송춘, 건국의 길, 감기철학, 문화조선의 건설, 병에 대하여, 문학열, 문화와 정치, 농민예찬, 금전철학, 주부송, 문장의 도 등 다양한 안목으로 수필문학에 접근하고 있다. 얇은 종이 책면이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목차를 들춰본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맨 앞에 있다. 고교시절 국어책에서 만난 것들이라 몇몇 작품은 내게 아주 친밀하다. 무엇보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修讀五車書에 묻혀 많은 책을 섭렵하던 때의 좋은 추억에 잠길 수 있어서 좋다.

또 하나의 책이 있다. 김상옥의 ‘시와 도자’ 라는 이름의 산문집이다. 1975년 3월25일 대한공론사라는 인쇄소에서 발간된 것이다. 대학에 있을 때다. 서예를 좋아하는 K교수와 유독 친밀했다. 어느 날 초정 김상옥이 그의 연구실에 와 있다는 전화가 왔다. 처음 만났지만 붙임성이 있었다. 국어책에 실린 ‘백자부’, ‘봉선화’의 저자라는 생각 때문일까.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지금도 이 시조를 읊으면 시골 흙담 아래에 핀 봉선화가 보인다.

문학예술의 향기는 짙고 질기다. 깐깐한 듯 보였지만 얘기를 나누는 중에 그의 깊은 인품을 볼 수 있었다. 서예에 사용하는 일체의 물목들을 지니고 다녔다. 그의 작품집 ‘시와 도자’에 내 이름을 곁들어 간단한 축서를 써 주고 붉은 색 낙관을 금방 그린다. 내 호를 따서 ‘백암산방’白巖山房이라는 현판용 글을 써 주었다. 액자를 만들어 서재 방에 걸어두고 있다. ‘나이 들면 모든 것을 비워야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탐욕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살라는 의미다.

나는 그 말을 쉽게 소화하지 못한다. 말은 쉽지만 비우기는 정말 어렵다. 왜 비워야 하는가. 비우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의식적으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비우면 우선 욕구가 상실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한다. 변화는 문명과 문화에 대한 순응이다. 욕구는 삶을 유지케 하는 근원이다. 욕심은 버리되 욕구의 생성은 반복돼야 한다. 고책이 꽂힌 서가에 눈을 돌린다. 숱한 세월을 함께 해준 것이 고맙다. 고책에서 살아 온 숨결을 느끼고 식어져 가는 욕구의 생성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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