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전염병을 도망가게 만드는 ‘대범한 얼굴’
귀신·전염병을 도망가게 만드는 ‘대범한 얼굴’
  • 김성미
  • 승인 2021.02.1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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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온의 민화이야기] 역신을 물리친 이름, 처용(處容)
아내와 동침한 인물을 본 처용
화내지 않고 노래 부르며 춤춰
동침한 자, 감동 받아 역신 변신
처용 형상은 피하겠다고 약속
백성들, 그의 그림을 門神으로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출발
문배서 춤·노래 등 형태 변모
임금의 장수를 축원하고
관료 잔치 때 놀이로 기능
이틀만 지나면 추석과 더불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 시작되는데, 이번 설도 고향 방문이 그리 녹록치 않다. '설'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설다', '낯설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새해 첫날에 일 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내게 해달라는 바람에서 '삼간다'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외에도 해가 지나면서 늙어가는 처지를 서글퍼한다는 뜻으로 '섦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설날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알 수는 없지만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보면 '삼국사기'에서 261년 백제에서 설맞이 행사를 했고, 651년 신라에서 정월 초하룻날 왕이 신하들과 새해 아침에 축하를 하고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백제 고이왕, 책계왕 등이 정월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 고려 시대에는 설날이 정월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 등과 함께 9대 명절의 하나였고, 조선 시대에는 한식, 단오, 추석과 함께 설날이 4대 명절 중 하나로 여겨졌다고 하니 그 역사가 길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설날에는 다양한 풍습과 놀이가 있는데 민화와 관련해서는 정초에 처용(處容)의 그림을 문에다 붙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처용설화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헌강왕이 울산 지역에서 풍경을 감상하며 노닐다가 돌아가는 길에 잠시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왕이 신하들에게 무슨 일인지 물으니 일관(日官)은 "동해 용왕이 꾸민 일 같사오니 선행을 베푸시어 그를 달래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동해 용왕을 위하여 여기서 가까운 곳에 절을 세우도록 하라."라고 명하자 자욱하던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개었다. 그 후로 그 냇가를 개운포(開雲浦)라 불렀다. 동해 용왕은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려 왕의 앞에 나와서 "베풀어주신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일곱 아들 중의 하나가 왕을 따라가서 보필하게 되었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하고 급간이라는 벼슬도 주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처용의 아내를 사랑한 역신(疫神)은 사람으로 둔갑하여 처용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몰래 아내와 함께 잤다. 처용이 집에 돌아와서 두 사람이 함께 누운 것을 보고,

"동견(東京)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집에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는 내 것이다마는 앗은 것을 어찌할꼬"라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추었다. 깜짝 놀란 역신은 본모습으로 변하여 무릎을 꿇고 "제가 공의 아내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여 감히 못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저에게 화를 내고 꾸짖지 않으시니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앞으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사라졌다. 이 일이 있은 후 처용은 문신(門神)으로 신격화 되고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문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좋은 일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疫神은 헌강왕때 處容이라는 門神신화가 생성될 수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역병은 두창, 천연두라고 불리는 전염성이 강하며 치사율이 매우 높은 질병으로서 특히 8. 9세기에 동아시아 전반에 위력을 떨쳤다. 이에

중국에서는 종규 등을 비롯한 여러 축역신과 문신들이 그리고 신라에서는 처용이라는 문신신화가 만들어져 유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전 시대까지 극성을 부리던 재해와 전염병이 헌강왕대에 이르러 잦아들면서 조금이나마 사회가 안정되던 것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설화로 보인다.

많은 학자들이 민화의 기원을 찾고자 연구를 했는데, 경주대학교 정병모 교수는 민화의 시작을 이 처용(處容)의 형상(形狀)을 문에 붙이는 '처용 문배'라고 주장한다.

"문배(門排)란 정월 초하루 대문에 붙여 잡귀를 막고 복을 불러들이는 용도로 사용된 그림이다. 처용 문배는 처용의 얼굴과 모습을 그린 문배를 가리킨다. 세시풍속으로 본 민화의 시작은 문배이고, 이 문배 가운데 통일신라시대의 처용 문배가 그 첫머리에 해당한다." <한국불교미술사학회 학술저널 인용>

그렇다면 처용 문배를 민화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화의 서민의 회화로, 서민작가가 그렸거나, 서민의 취향에 의해 그려졌거나, 아니면 서민 수요의 그림이라면, 민화로 볼 수 있다. 제작, 취향, 수요 중 어느 하나가 서민에 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처용 문배는 백성들이 향유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민화라 할 수 있다.?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 에는 다음과 같이 처용 형상을 백성들이 향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인(國人)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잡귀를 물리치고 상서로움을 맞아들였다." <한국불교미술사학회 학술저널 인용>

국인(國人)이란 백성을 일컫는 말로서, 이들이 처용 상(像)을 문에 붙여서 잡귀를 물리치고 상서로움을 맞이했다고 한다. 처용 문배가 벽사와 길상의 그림으로 역귀를 퇴치할 수 있는 주술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 처용의 형상이 어느 특정 계층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선호했던 그림이라는 점이고, 그래서 우리 민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 이후 처용은 문배(門排), 처용무(處容舞), 처용가(處容歌), 처용극(處容劇)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풍속을 기록한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齋叢話)>에서 다시 처용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새해의 명절에 거행하는 일이 한 가지뿐이 아니나, 섣달 그믐날에 어린애 수십 명을 모아 진자(?子)로 삼아 붉은 옷에 붉은 두건을 씌워 궁중(宮中)으로 들여보내면 관상감(觀象監)이 북과 피리를 갖추어 소리를 내고 새벽이 되면 방상시(方相氏)가 쫓아낸다. 민간에서도 또한 이 일을 모방하되 진자는 없으나 녹색 죽엽(竹葉)ㆍ붉은 형지(荊枝)ㆍ익모초(益母草) 줄기ㆍ도동지(桃東枝)를 한데 합하여 빗자루를 만들어 대문[?戶]를 막 두드리고, 북과 방울을 울리면서 문 밖으로 몰아내는 흉내를 내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 한다. 이른 새벽에는 그림을 대문간과 창문에 붙이는데, 그림에는 처용(處容)ㆍ각귀(角鬼)ㆍ종규(鍾?)ㆍ복두관인(僕頭官人)ㆍ개주장군(介?將軍)ㆍ경진보부인(擎珍寶婦人) 그림ㆍ닭 그림과 호랑이 그림 따위였다."

새해 명절 이른 새벽에 대문간이나 창문에 붙인 상, 즉 문배 가운데 첫머리로 처용의 얼굴을 내세웠고, 이어 각귀, 종규, 복두관인, 개주장군, 경진보인, 닭, 호랑이 그림을 거론했다. 이것은 조선 초기 문배에서 처용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라시대 처용의 이미지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근거는 1493년에 간행된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처용상이다. 이 처용상은 주걱턱에 주먹코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인자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다소 이국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때문에 처용상의 국적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아랍인이라는 설, 울산의 호족이라는 설부터, 무당이라는 설, 헌강왕의 서자라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처용관복-악학궤범
‘처용관복’ 1493년 악학궤범제 9권 관복도설(冠服圖說) 중 처용관복도설(處容冠服圖說)

처용은 궁궐에서 문배뿐만 아니라 음악, 놀이 등 여러 쟝르의 제제(提題)로 사용되고, 벽사를 통해서 임금의 장수를 축원하는 기능까지도 수행했다.

아래 그림은 기해기사계첩(己亥耆祀契帖)으로 조선 숙종 46년인 1720년에 당대 유명 궁중화가들이 1719년 4월 17일~18일에 양일간 기로에 대한 효와 감사의 마음을 널리 알리고 나라를 위해 청춘과 정년을 다 바친 70세 이상 노인들과 퇴직 관료들을 위하여 나라에서 기로연을 열어준 후 그 행사장면을 궁중화가들이 그려 남긴 궁중기록화첩이다.

 

처용관복-악학궤범
기해기사계첩(己亥耆祀契帖) 지본 채색 36cm x 52cm 국보 32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축하연에 등장하는 처용의 모습을 보시라, 그 축하연의 하이라이트가 처용의 모습을 한 무용수를 통해 처용의 역할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알 수 있다.

 

처용관복-악학궤범
중요무형문화제 제 39호 처용무 보유자 김중섭의 처용무

어제 오늘 뉴스에는 설에도 마음 놓고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애달픈 설이라고 하고, 그러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기발한 설 인사 문구도 소개한다.

설날에 불려 지던 동요를 개사해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내년 이래요~."라고도 했다.

처용 문배는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신라사회를 휩쓴 전염병은 민간에서 자연신에 가깝게 신앙되던 존재를 문신신화(門神神話)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비록 그 시대의 큰 고통을 야기했지만, 이국적인 모습의 처용을 통해 그 역병을 이겨냈다는 점은 활발한 국제교역과 교류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제 이영실작가가 그린 현대의 처용문배를 보시고, 우리의 역병 코로나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물리치기를, 그래서 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 좋고, 우리 우리 설날이 오늘이기를 기원해 본다.

 

이영실-처용문배1
이영실 작 ‘처용분배’ 107cm X 80cm 지본채색 2012년 제작, 작가소장

<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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