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봄을 리필하다
봄, 봄을 리필하다
  • 승인 2021.02.15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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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휴일 아침, 촉촉이 땅을 딛고 맨발로 걸어오는 누군가의 기척이 들린다. 나가보니 봄비다. 등을 떠밀어내며 이별을 고하던 새해도 잠시, 추스를 새도 없이 이월을 마주하며 가슴 덜컹하던 기억,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딱히 한 일도 이루어놓은 것도 없이 어영부영하는 새에 이월은 그렇게 봄, 봄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살아 온 세월도 살아갈 시간도 칠판 가득 분필로 쓴 글씨처럼 썼다가 지우고 또다시 지우고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지나온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거니와 문신처럼 지워지지도 않으니.

계절의 끝에 서면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온통 수세미 뭉치가 된다. 그런 날이면 산책하듯 걸어 재래시장을 찾아가거나 책방에서 하루를 보내는 날이 잦다. 또 어떤 날은 스스럼없는 친구를 불러내 찻집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 어느 달보다 짧은 이월을 올려다본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저녁이거나 최후의 만찬처럼 하루만, 딱 하루만 더. 그러다 정작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하얗게 새어버린 날처럼 이월은 그렇게 눈물과 후회와 아쉬운 것들을 글썽글썽 매단 채 봄으로 이월되고 있다.

‘무한리필’이라는 말이 있다. 리필이란 다시 채운다는 말이다. 마음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올봄엔, 다시 채운다는 그 말을 내 마음속 감정의 영역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앉혀본다. 세심하게 미처 챙기지 못하고 놓쳐버린 것들과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정을 리필 하듯. 모르고 지나쳐버렸거나 잃어버린 일상을 리필하고 싶다. 빡빡 숙제처럼 무수한 계획들로 채워졌던 달력의 첫 장.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미적미적해 져버린 남편과의 첫 만남. 아이들을 향해 잔소리 퍼부어대다 문득 되돌아본 첫울음의 감동. 나중에 효도해야지 다짐만 하다 떠나보내 버리고 만 아버지의 든든한 그늘까지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한 잔 더 리필해 주는 찻집이 있다. 그곳에 가면 마치 재래시장에서 덤으로 얹어주는 콩나물이나 땅콩 몇 줌 더 받았을 때처럼 기분이 들뜬다. 리필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직도 덤으로 움직이는 곳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설레기까지 한다. 대형마트나 정찰제 매장에선 눈곱만큼도 깎아준다거나 더 얹어주는 일을 기대할 수 없으니.

리필로 나오는 것이니 그저 먹던 잔이나 종이컵에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다 마신 빈 잔을 가져다주면 새 잔에 처음 주문할 때와 같이 다시 담아 내어준다. 비워짐과 동시에 알아서 가져다주진 않지만 ‘리필 해 주세요’라고 손을 들어 외치는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덤이다. 미안한 마음에 눈치를 보거나 미적거릴 때가 없진 않지만 그 머뭇거림까지도 알아채고는 기분 좋게 기꺼이 내어준다. 거기에다 포인트까지, 인상 한 번 찌푸리질 않고 챙겨준다. 다음에도 꼭 이용해 달라며 상냥한 마음마저 리필 해 준다.

‘소원이 있느냐. 그렇다면 세 가지만 말해 보라’던 신 앞에서 우물쭈물 생각만 하다가 오늘을 끝내 버린다면 또 다른 후회를 남길지도 모른다. 최고의 용서는 잊어 주는 것, 징징대지 않는 것, 무심해지는 것이라 한다.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맞이한 일상 또한 내 선택에 의한 의식의 결과가 아닐까. 겨울을 보내고 봄을 들이듯 봄 속에서 내내 겨울인 채로 남아있듯 내 몫이다.

가끔,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을 때가 있다. 닫힌 마음 앞에선 누구도 혼자가 된다. 내 맘에 들여야 비로써 봄인 것처럼, 덤이라고는 하지만 먼저 입을 열고 마음을 열어 외치지 않으면 주고받을 수 없는 맘이다.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봄이다. 지나간 어제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어 잡고 뭐부터 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지 ‘우물쭈물하다 여기에 잠들다’라던 비문 같은 것은 세우지 않기를 바라본다. 미적대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생의 마지막 신의 한 수(手)를 들 듯 봄, 봄에 외쳐본다.

“여기 리필 해 주세요”

봄비가 오는 밤거리를 가로등이 길을 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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