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품위와 존엄이 우리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길
[백정우의 줌인아웃]품위와 존엄이 우리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길
  • 백정우
  • 승인 2021.02.1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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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미자’역으로 출연한 윤정희

설 명절을 앞두고 놀라운 뉴스가 전해졌다. 알츠하이머와 당뇨로 투병 중인 배우 윤정희가 남편과 딸의 외면 속에 파리 외곽에 방치되어 있다며 구해달라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반박하였고 청원자로 알려진 윤정희의 동생들은 가족사를 사회문제화 시킨데 죄송함과 재산싸움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내용의 진실 여부를 떠나 안타까운 것은 평생을 예술에 헌신한 윤정희와 백건우 부부의 사생활이 여지없이 발가벗겨졌고,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관심 두는 한국인 특유의 문화와 유명인의 사생활이 만나자 이번에도 인터넷은 뜨겁게 달궈졌다.

1940년대 할리우드 최초의 미국 산 Pin-up girl인 리타 헤이워드는 1980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1987년 69세에 숨졌다. 헤이워드의 딸은 “엄마의 병이 알코올중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치매 진단을 받고서야 지옥 같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미국 알츠하이머협회는 1985년부터 매년 ‘리타 헤이워드를 추모하는 치매 기부모임’을 열고 있다. 헤이워드 덕분에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사람들이 알게 됐다는 이유에서다.

내 아버지도 치매 판정을 받았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그 사이 아버지는 전국을 배회하셨다. 인천과 수원과 천안과 강릉과 구포 등 전국의 파출소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아버지를 모시러 간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서 돌보는데 한계가 있으니 요양병원에 모시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끝까지 함께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굳은 의지는 변할 줄 몰랐다. 나는 너무 힘이 들었지만, 남들에게 아버지의 나약하고 무너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를 설득할 순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윤정희는 한 인터뷰에서 그레타 가르보처럼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다가 스톱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추하지 않고, 의연하고, 건강하게 늙고 싶다고 말했다. 오드리 햅번처럼,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세월이 흘러가는 자연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도 했다.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2010년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이창동 감독의 ‘시’이다.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사는 66세 치매 여성 역할이었고, 실제로 66세였던 그는 치매가 현실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언론시사회 당시 윤정희는 “여배우로서 나이 먹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관객들이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준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윤정희를 둘러싼 보살핌 공방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내가 (영화평론가라는 이유로 또는 그가 공인이라는 이유만으로)알아야 할 자격도, 이유도 없다. 사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외려 나는 윤정희와 그의 가족이 가십과 스캔들에 혈안이 된 세인의 관심에서 안전하고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한국영화 황금기를 수놓으며 우리를 위로한 은막의 스타가 무대에서 내려오고 있다. 그가 평온하고 평화롭게 팬들과 작별할 수 있기를. 품위와 존엄이 우리가 기억하는 윤정희의 마지막 모습이기를 바란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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