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봄바람
  • 승인 2021.03.0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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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봄은 바람에서부터 온다. 차가워서 피하기만 했던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바람으로부터 온다.

봄바람이 불면 얼어있던 땅이 녹아 물기를 머금어 촉촉하면서도 폭신폭신한 흙처럼 사람의 마음도 부드럽고 포근해진다. 따스한 햇살과 바람에 이유모를 설레임마저 생긴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고, 집에만 있어서도 안 될 것 같고, 혼자 있어서도 안 될 것 같다. 어디론가 누구를 만나러 가야할 것 같고, 가고 싶어지고, 가도록 부추긴다. 이상화 시인의 말처럼 '봄신령이 지폈나보다'.

홍희는 봅바람에 이끌려 산과 들을 뛰어다닌다. 엄마, 아버지가 밭고랑을 뒤집어 엎어 고추농사 지을 준비를 하는 동안 밭둑에서 쑥을 뜯고, 냉이를 캔다. 겨울에 누렇게 마른 잡초를 불에 태워 재만 남은 자리에서 땅을 뚫고 나온 잔디와 잡초 틈 새에서 쑥이 자라고 냉이가 자랐다. 땅 속 깊은 곳에 그들의 씨나 뿌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나보다. 과일 깍는 작은 칼을 뿌리 속으로 슥 찔러넣어 자르듯이 휙 그어서 쑥 잎만 자른다. 엄마는 된장을 풀고 밀가루도 약간 넣어 걸죽한 쑥국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 맛있지는 않지만, 봄에만 맛볼 수 있는 국이라 봄내음을 혀 끝으로 맡으며 몸 속으로 봄의 기운을 넣는다. 쑥국 말고 새참으로 할 수 있게 쑥에 밀가루를 버무려 쪄 내기도 한다. 설탕맛이 살짝 들어가 달콤하면서도 쑥의 쓴 맛이 조화를 이룬다. 엄마와 아버지는 잘 드시지만, 아직 어린 홍희 입맛에는 쑥의 거친 듯한 느낌이 익숙지가 않아 잘 먹지는 않는다. 쑥을 아주 많이 뜯으면 쪄서, 쌀가루와 섞어서 쑥떡을 만든다. 집에서는 할 수 없고, 떡방앗간에 맡긴다. 절편처럼 만들기도 하고, 찐 떡을 잘라서 콩가루에 묻혀 먹기도 한다. 홍희는 둘 다 맛있다.
씁쓰름함과 찰짐의 어울림이 찰떡 궁합이다.

밭이 끝나는 지점에 도랑이 있다. 도랑 얼음이 녹아 반쯤 부서져 내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은 깨끗하다. 겨울을 이겨낸 물이 졸졸 흐른다. 도랑 둑에 뽀족한 돌나물이 싹 터서 꽃다발처럼 송이송이 돋아났다. 그것도 깨끗이 씻어 초고장에 찍어 먹으면 봄이 입 안으로 들어온다.

입으로 느끼는 봄이 있지만, 눈과 코로 느끼는 봄도 있다. 봄나물이 돋아나는 밭둑과 논둑 너머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고, 산 속에서 무리지어 피어나는 진달래가 소녀의 가슴을 분홍색으로 물들인다. 야들야들한 진달래 꽃잎이 너무나 예뻐, 봄나물이 담긴 소쿠리를 밭둑에 던져두고, 산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탐스럽게 큰 봉우리가 핀 진달래 꽃 나무를 꺽는다. 작은 손으로 꼭 쥘 수 있는 만큼 꺽을 때도 있고, 가슴가득 끌어안을 만큼 꺽어온다. 가슴이 터질 듯한 느낌을 어른이 된 지금도 잊지를 못하겠다.

남편은 봄이 되면 시골에 가서 산등성이에 냉이를 캐자고 한다. 반찬 재료를 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지 않고도 구할 수 있으니 조금만 부지런하면 된다고 홍희를 데리고 다닌다. 불이 난 야산에 고사리도 뜯으러 가고, 달래도 캐고, 냉이도 캔다. 고사리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말려서 먹고, 달래는 전을 해서 먹는다. 냉이는 콩가루에 묻혀서 쪄서 먹는다. 자연산 나물을 먹으니 반찬값은 아끼지만, 자동차 기름값도 만만치 않다. 바람도 쐴 겸 가자는 것이 남편의 취지라 기름값이 아깝지도 않다. 나물의 모양이나 향기, 영양성분이 몇십년이 지났다고 바뀌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맛이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올 봄에도 봄바람이 분다. 자꾸만 어릴 적 기억속의 봄이 내 마음을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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