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음식 세계로]공물로 관료 배불리던 경상감영…음식 접객문화의 뿌리
[대구음식 세계로]공물로 관료 배불리던 경상감영…음식 접객문화의 뿌리
  • 김종현
  • 승인 2021.03.10 21: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영남유림의 중심지, 경상감영의 음식문화
고대 강국 음식 집결지 ‘달구벌’
음식 독성제거·보관술 등 발달
삼국 군사 요새 현풍에 ‘석빙고’
대구, 안빈낙도 음식문화 정착
안동서 대구로 옮긴 경상감영
영남유림 선비문화 발전 기폭제
관리 환심 사는 음식 상납 성행
현풍석빙고
현풍 석빙고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올라간다. 그림 이대영

달구벌은 선사시대부터 주변 강대국의 틈새에서 중립적 위치 혹은 줄타기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최혜국대우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선사시대유적 발굴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는 i)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강력한 왕국이 없었는데 황금왕관이 몇 차례 발굴, ii) 동구 불로동(不老洞)고분 및 경산 압독국(押督國)유적 그리고 칠곡 구암동고분군(鳩巖洞古墳郡) 발굴 등에서 수혈식 목곽분, 횡혈식 석곽묘와 옹관묘(甕棺墓)가 혼재된 상태로 발굴, iii) 신라 지증왕(智證王) 당시 가야와 대치하고 있는 현풍(玄風)에다가 귀순인사와 지방토착세력에게 국왕(귀족)으로 음식대접을 위해 석빙고(石氷庫)를 설치했다. 이를 종합하면 삼국각축의 요새지역으로 중립설득을 위한 국빈예우를 했기에 요사이 말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혹은 게임딜러(game dealer)로 역할을 했다. 문화의 발생과 융성에서 본다면 시정역할(市井役割) 혹은 중심교량(central bridge)으로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geopolitical)인 위상에서 달구벌은 군사적 요충지로뿐만 아니라, 특히 음식문화에 있어서는 i) 주변강대국 왕궁의 최고급음식이 집결하였으며, ii) 특이한 음식문화의 결집으로 새로운 융합음식(fusion food)이 발달했으며, iii) 음식관련 각종기술로는 독성제거기술(덖기, 삶기, 중화, 말리기, 튀김 등), 보관기술(석빙고, 지하매장, 토굴저장) 및 요리기술(굽기, 찜, 지짐, 볶음, 찌개, 무침) 등이 도입되어 하이브리드 요리기술(hybrid cooking skill)을 낳았다.

특히 신라의 갓나물 김치음식은 대구에선 6세기부터 욱수가마터(玉山陶窯)에서 만든 팽이형토기(角形土器)를 이용해서 겨울김장으로 애용해왔다. 나중에는 김칫독을 개량해 전국으로 김치음식을 보고하는데 앞장섰다. 최근 조금 소홀히 하는 바람에 김치저장용 딤채(Winia)냉장고는 전남광주에서 개발하여 선두를 차고 나가고 있다. 오늘날도 많은 분들이 “김치 없이는 못 살아. 나는 못 살아”라고 애찬 할 정도다. 2003년 사스(SARS)가 전 세계에 유행할 때도 방역식품 김치가 대두되었고, 2013년에 유네스코 한국고유음식으로 등재되었다. 2020년 K방역과 방역식품 김치가 해외언론에서 극찬을 받았다.

◇음식보관의 첨단보관소 석빙고

과거 비단길목(silk road)이었던 이란의 케르만(Kerman)이나 이란의 배꼽이라는 야즈드(Yazd)의 메이보드성(Mebod Castle)에서, 2017년 상영했던 만화영화 ‘스머프의 비밀 숲(Smurf : The Lost Village)’에 나오는 개구쟁이 스머프의 모자모양과 같은 흙집(moayedi)에다가 사각 흙기둥(badgir) 통풍구가 보인다. 구조는 지하수통로, 지하 냉장고, 지상·지하의 통풍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제빙(製氷)과 저빙(貯氷)시설 모아예디((moayedi)를 기원전에 개발해서 설치해 음식보관, 더위 식히기, 시신보관 등에 이용했다. 신라는 기원전(BC) 108년경 한사군(樂浪郡)을 통해서 산동반도의 천잠법(天蠶法)과 비단직조기술을 터득한 진한(辰韓, 신라) 땅 서라벌에서 조하주(朝霞綢)라는 명품을 만들어 중국을 거쳐 대월국(大月國, Roma)에까지 판매했다. 신라는 BC 57년부터 직접 비단교역을 하면서 비단길에서 모아예디 시설을 눈여겨봤다가 조국 신라에 와서 지역자연환경에 적합하도록 개량하여 AD 27년경(弩禮王) 반월성 안에 폭 2.4m, 길이 18.8m, 높이 1.78m의 규모, 화강암 반월형구조에 3개의 환기통으로 경사지 배수와 입구계단을 갖춘 석빙고(경주시 인왕동 387-1외 120필)를 설치했다.

이런 얼음 보관시설인 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현풍 상리 632, 보물 제673호)는 대가야와 신라가 각축하면서 중간지역 달구벌을 극진히 예우하고, 대가야에서 전향하는 인사에게 최고수준의 음식대접을 위해서 지증왕 때에 현청(縣廳)수준의 고을인 현풍에 설치했다.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서 i) 철산지 합천야로에서 철정을 이용해 철제 무기생산 논공(論工)이라는 최첨단 무기제조창을 설립했다. ii) 뿐만 아니라 진흥왕 때는 삼량벌정(參良火停)이란 병영을 설치해 1만여 명의 장병을 주둔시켰다. iii) 이어 고려시대에도 철제 무기생산을 위해 구지산 부곡(仇知山部曲)까지 설치했다.

그러나 석빙고에 대한 기록으로는 현존하는 금석문인 현풍읍성을 축성했던, 조선영조6년(1730) ‘순정기원후이경술십일월(崇禎紀元後二庚戌十一月)’로 새겨진 인근 건성비(建城碑)로도 봐서, 인근지역 안동석빙고(1737 혹은 1740) 보다도, 또한 창녕석빙고(1742)보다 8년이나 앞섰다.

이곳 현풍석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일반이 여름에 먹는다는 건 조선시대에도 그림의 떡이었다. 하물며 삼국 각축시대에 달구벌 현풍에 설치했다는 건 음식관리의 최첨단시설이었다. 동짓날 전후 채빙(採氷)해 석빙고에 넣는 의식인 사빙제(司氷祭) 혹은 장빙제(藏氷祭)와 석빙고 문을 여는 개빙제(開氷祭)를 거행했다. 현풍석빙고 관련 지역문화제의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김처정 재령이씨 효열각(金處精 載寧 李氏 孝烈閣)에 “시아버지와 손부의 효행을 지역유림을 통해 조정에 상신하자 숙종(肅宗, 1660~1720)은 정려와 현풍석빙고 관리관인 빙고별검(氷庫別檢, 종6품)을 교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상감영(慶尙監營), 양반(선비)음식문화의 산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군사전략상 경상감영을 달성공원에 임시 이전했다가 안동으로 왔고 다시 대구로 옮길때 1601년 안동양반들이 대구로 오는 마차 앞에 드러눕기까지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달구벌)로 경상감영이 옮겨졌다.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함에 따른 영남유림의 본거지도 안동에서 대구로 굳어졌다. 이것보다 문화측면에선 i) 사장중시(詞章重視) 선비문화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고, ii)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상의 기반 위에 진공문화(進供文化)가 제자리를 잡았다. 다시 말하면 사장중심 선비문화 가운데 유림을 통하고, i) 지방관(감영)을 통해서 국왕에게 상신되는 민의상달(民意上達)의 체계가 정립되었다. 이에 반해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상이 굳어졌고, 쟁송과 억울함의 해소를 위해 정성과 모양새 좋게 접객하려는 형식적인 과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조선시대 갑인자(甲寅字) 등의 활자관리를 관영에서 했기에 유인문화를 파생시켰다. 양반들은 관영활자를 빌려서 문집, 서책 등을 출간하게 되었다.

일반백성들은 관공서에 접근하기 위한 과정상의 각종 비용(글 값, 도장 값, 전달비, 속행비)이 발생했고, 목민관은 물론 관리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음식(飮食), 주가(酒歌), 수청(守廳) 등의 진공문화(進供文化)가 생겨났다. “경상감영 앞마당은 진공(進供) 없이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고 할 정도였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지방목민관(觀察使) 한번 나가면 3대는 먹고 산다. 그러나 경상감사는 7대가 배 두드리고 산다.”고 할 정도로 물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래서 영조(英祖)는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기둥에다가 친필주연(親筆柱聯)을 걸어놓게 했다. ‘자네가 받고 있는 녹봉은 백성의 살이고 피라네. 백성들 속이기 쉽지만, 하늘을 속이지 못할 것인데(爾俸爾祿, 民膏民脂. 下民易虐, 上天難欺).’라는 주연이 1970년까지 걸려있었다. 이렇게 해도 별다른 효과는 없었고, 진공문화는 맥을 이어 오늘날까지 유지해왔다. 인습에 젖은 진공문화는 글로벌 시장에서는 국가경쟁력의 일환인 국가청렴도를 낮추고 있다. 대구시의 행정생산성 비용은 높고, 행정서비스의 청렴도는 전국 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상감영으로 인해서 음식과 접객문화엔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경상감영은 국가의 궁궐에 해당하여 궁궐음식문화가 그대로 접목되었다. 즉 i) 제례, 향음주례, 접빈객에 따른 음식문화가 전파되었고, ii) 성긴 음식재료를 자연 그대로 먹거나(素食) 적은 양으로 자주 먹는(少食) 식치개념(食治槪念)의 음식문화가 정착되었다.

전한(前漢, BC202~ AD 8)시대 기백(岐伯)이 황제이름을 빌려서 ‘황제내경(皇帝內經)’을 저술했다. 황제5경 가운데 하나인 의학서에서 언급했던 식치개념은 한 발 더 나간 식약동원(食藥同源) 혹은 의식동원(醫食同源) 원리에 따른 약선음식(藥膳飮食)으로까지 발전했다. iii) 유교경전 논어에서 ‘나물먹고 물마시며 팔베개로 잠을 잔들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있을까?’라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음식문화가 대구에 정착되었다.

음양오행(陰陽五行), 오방색채(五方色彩), 사상의학(四象醫學) 등이 음식에 접목되어 ‘심신이 건강한 음식문화(mindful healthy food culture)’를 개척했다. 특히 지역선비가문에서는 전통적인 종가음식문화(宗家飮食文化)를 형성해 왔다. iv) 선사시대 삼국각축의 융합음식문화를 창조했던 달구벌의 역할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오신채(五辛菜 : 마늘,파, 달래, 부추, 흥거)를 금기시한 연밥, 산채비빔밥, 두부(일명 콩고기), 소면, 유과(油果) 등의 불교적 사찰음식문화를 흡수하였다. 여기에 경상감영 음식문화까지 복합하고 융합해 퓨전음식문화의 제조창이 되었다. v) 1658(효종9)년 임의백(任義伯, 1605~1667) 관찰사가 경상감영 내 객사주변(오늘날 중부경찰서)에 약령시(藥令市)를 개장한 게 효시가 되어, 1908년에 현재 남성로 약령시가 자리를 잡았다. 이로 인해 대구음식문화에는 약치개념(藥治槪念)이 도입되면서 지역생산 각종약재를 첨가하는 음식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삼계탕(蔘鷄湯), 옻닭(漆鷄湯), 쌍화차, 약초감주(藥草甘酒), 감비음식(減肥飮食) 등의 치유음식(healing food) 혹은 웰빙음식(well-being)까지 개발했다.

글=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