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기대어 봄
봄에 기대어 봄
  • 승인 2021.03.1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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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달이는 한집에 사는 반려 묘다. 해와 달리 달은 오래도록 눈빛 마주하고 앉아 있어도 눈이 부시지 않아 좋아 이름을 달이라 지었다.

첫날밤을 치르고 온 달이가 밤이 이슥하도록 창가에 앉아있다. 어둠의 커튼이 창틀에 내릴 때까지 틈만 나면 그곳에 올라 봄빛이 완연한 창밖을 바라본다. 긴 꼬리를 가슴 안으로 들여놓은 채 석고상처럼 앉아 있다. 가끔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지나가는 작박구리와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방충망을 비집고 들어온 철 지난 담쟁이 뿌리에도 모나리자 같은 미소를 보낸다.

달이가 앉아있는 창문 밖, 한 칸 내려선 화단에 자리 잡은 매화나무가 하나둘씩 연분홍 꽃등을 내건다. 달이와 매화는 오랜 친구처럼 지난밤의 안부를 묻는다. 달이는 매화의 대답을 듣는 듯 귀를 쫑긋 세운다. 지난겨울, 매서운 추위를 잘 견뎌냈다며 눈높이를 맞춘 채 서로를 위로한다.

그들처럼 누군가의 눈을 오랫동안 마주하고 앉아 바라본 지가 언제였던가! 나는.

신행을 끝내고 달이를 데리고 돌아오던 날, 신방을 차려준 마흔쯤의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내게 이른다.

"사흘 밤낮, 밥 먹는 것도 마다하고 나와 눈 한 번 맞출 새도 없이 죽어라 사랑만 하던걸요."

불 꺼진 사무실 안, 낡고 삐걱거리는 책상 밑으로 먼지 풀풀 날리도록 옮겨 다니며 부둥켜안고 사흘 밤낮을 뒹굴었다고 한다. 한 때, 자신에게도 그토록 뜨거웠던 신혼 시절이 있었건만 지금은 아내랑 데면데면한 사이가 됐다며 말끝을 흐린다. 사는 게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언제부턴가 서로 각방을 쓰고 있더라는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산 세월보다 남편과 살아온 세월이 훨씬 더 길다. 지나온 길을 헤아려 본다. 그와 나 사이에도 애틋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온밤을 꼴딱 새우던 그런 날이 있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게만 보이던 그런 때가. 살아온 세월만큼 단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금과는 달리 그땐 그의 모든 것들이 그만이 가진 개성이고 매력이었으며 장점으로 보였다. 날아가는 방귀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던 날들, 귀로 듣고 말은 눈으로 해도 충분한 교감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사람도 아닌 동물에 지나지 않는 고양이 달이와 자연의 한 컷 풍경에 지나지 않는 매화마저도 서로 소통하며 힘을 얻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날, 사랑이니 소통이니 하는 것들이 먼 곳에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일상적이고 가장 평범한 것 안에서, 그리고 내 눈앞에 매번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의 풍경들 속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음을.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교감할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이던가. 따사로운 봄날, 달이는 새벽부터 창틀의 위태로운 난간 위에서 근심 어린 눈빛으로 매화나무와 속삭인다. 잠시 담벼락 아래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온몸을 내맡긴 채 졸기도 하고 혹은, 알약 같은 몇 낱의 밥을 먹기 위해 잠시 내려설 뿐, 둘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잠든 달이의 가슴을 몰래 뒤적여본다. 복사꽃 같은 발그레한 젖멍울이 여섯 개 나란히 부풀어 오른다. 매화 꽃망울처럼 수줍은 듯 피어난다. 때를 같이 맞추었는지 창밖, 매화도 연신 배냇저고리 같은 연분홍빛 꽃들을 망울망울 피워낸다.

밤낮의 기온 차만큼이나 밤과 낮의 기분 차도 큰 요즘이다. 한동안 세상의 일에 지쳐 몸도 맘도 성한 곳이 없다. 지나온 삶이 온통 겨울만 같아 어서 세월이 지나가 늙기만을 바랐다. 모두 내버리고 혼자서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러다가도 해가 지고 찬바람이 언뜻 불어오면 그 누구보다 잰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돌아갈 곳이 있어 좋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 여기며.

길고 지루한 겨울을 묵묵히 잘 견뎌낸 보상은 아니었을까. 봄이 내게 준 선물은 헬 수 없다. 순산을 한 달이 덕분에 새끼 네 마리가 더해져 일가를 이루었다. 달이와 매화로 인해 우리들 생의 봄날, 청춘의 한때로 돌아가 볼 수 있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매향 가득한 화단에 서서 봄의 풍경들을 가슴 가득 끌어안아 본다.

잠시 잊고 지냈던 그 남자의 따뜻한 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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