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서 숙성된 김치를 유기그릇에…경상감영 음식문화의 품격
석빙고서 숙성된 김치를 유기그릇에…경상감영 음식문화의 품격
  • 김종현
  • 승인 2021.04.07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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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10) 김치의 본향 달구벌
이란 케르만 등지서 쓰던 제빙시설
신라비단장수가 도입한게 석빙고
귀빈접대용 갓김치 등 상시 비축
팽이형토기에 담아 숙성시켜
7세기 이후 일본에 보내지기도
놋쇠밥그릇
놋쇠(鍮器)는 구리(Cu)와 주석(Sn) 금속을 78:22의 비율로 합금해 만들기에 금속이온이 바이러스와 같은 각종세균을 죽이는 미량동효과(Oligo-dynamic Effect)를 낸다. 이렇게 살균함으로서 부패로 음식 맛이 변하는 걸 방지했고, 유산균 등의 유익한 발효균외의 잡균을 모두 막아주었다. 이런 과학적인 사실에 착안한 경상감영 음식문화의 품격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안동서 대구로 옮긴 경상감영
한양조정 다음의 권력집단 형성
귀빈들이 숙성김치 즐겨먹어
유기, 세균 죽이는 미동량효과
부패로 음식맛 변화 방지하고
유산균 외 잡균 모두 막는 역할

인류최초 음식의 짠맛, 소금. 옛날 시골에서 간수(bittern)를 구할 수 없을 땐 두부 혹은 치즈를 만들기 위해 붉나무(Japanese sumac)의 흰색열매, 엉겅퀴 꽃, 함초(鹹草), 광나무 잎, 갈대뿌리 등에서 소금을 정제해서 사용했다. 붉나무 열매엔 칼륨염이 많아서 간수 대용으로 사용했기에 염부목(鹽膚木)이라고 불렸다. 잎에 붙어있는 벌레집(五倍子)마저도 탄닌산(tannin acid, C76H52O46) 성분이 많아서 입안이 터진 데 혹은 갈색염료(褐色染料)로, 잎이나 껍질은 타박상이나 멍든데를 치료하는 소염진통제(散瘀止血)로 사용했다. 그래서 전쟁이 잦은 성벽이나 환자가 빈발하는 가정에는 붉나무(bittern)를 응급상비약으로 심었다.

이렇게 민간상비약으로 심었던 나무로는 제주도 민가의 비파나무, 귀양살이하는 양반들에겐 자결용 유도화(柳桃花)와 초오(草烏, 일명 투구꽃), 우리나라 전체에선 붉나무(apanese sumac)와 느릅나무(Japanese Elm)였다. 외국의 사례론 터키 뽕나무와 산자나무(沙棘, 일명 비타민나무), 그리스 버드나무(일명 아스피린나무), 남미에선 모기학질을 대비한 소태나무(quinine tree)를 심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금은 식물을 고사시킨다고 알고 있으나 오히려 소금을 흡수해서 생존에 이용하는 식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초식동물(herbivores)에게는 i) 초식(草食)으로 미네랄 소금이 늘 부족했고, ii) 초식의 칼륨성분이 본능적으로 나트륨 흡수를 초래했다. iii) 아프리카 코끼리, 산양은 나트륨과 물을 찾아 이동했다. 인간도 식물이나 동물처럼 소금을 생명체의 유지를 위해서 찾았다.

소금은 바다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암석에서 나와서 물에 녹아 물이 모여드는 바다에 집결되었다. 태양에 수분증발로 소금결정이 만들어졌다. 생명체에 있어 소금은 생사를 갈랐다. 식물이나 미생물에게는 삼투압 혹은 미량동효과(oligo-dynamic effect)로 인해 살균 혹은 고사시키지만 곤충이상의 동물에겐 쓸개즙, 이자액, 장액 등의 소화액을 생성했다. 또한 근육세포에서 칼륨과 상호견제 펌프작용(Sodium & Potassium Pumps)으로 삼투압현상의 균형(항상성)유지, 타액(唾液)의 아밀레이스(amylase)효소와 염소로 위산이 만들어진다. 나트륨의 이온화로 신경물질의 정보전달, 심장박동 및 혈압조정 등으로 생명체유지에 핵심적 역할(pivot role)을 하는 무기물질이다.

기원전 수만 년 전부터 인간보다 산양, 코끼리 등 동물들이 먼저 바위를 핥아서 소금을 섭취했다. 서양에서 BC 5천 400년경 불가리아 솔니차타(Solnitsata) 소금광산을 운영하여 발칸반도에 소금을 공급했으며, 솔니차타(Solnitsata)라는 지명은 소금 채굴(salt work)이란 의미다. 독일 잘자흐(Salzach)란 강명(江名)은 소금 강(salt rive)이며, 잘츠부르크(Salzburg)란 지명은 소금 성(salt castle)이다. 로마제국의 용병들에게 소금을 급여로 공급했던 이집트 나트룬 계곡(Wadi el-Natrun)에서 유래돼 소금이 나트륨으로 명명되었다. 대영제국도 남부 켄트지역의 샌드위치(Sandwich) 혹은 노리치(Norwich) 등 소금산지를 ‘위치(wich)’라고 했다.

기독교에서 소금은 정화의식, 축복의미, 부패방지, 역할분담 다하기 등의 의미를 가졌다. 요르단 강 서안 3천년의 역사를 가졌던 고성(古城) 예리고(Jericho)가 물산이 줄고 인심이 나빠져 인구가 빠져나가고 있는 문제점을 지도자 엘리사(Elisha)는 소금 한 사발(a salt bowl)로 치유했다. 인간의 음식에서 가장 오래된 조미료이고 방부재는 바로 소금이었다. 해수에 3.5%의 염분이 있었기에 인류는 BC 6천년경부터 봄철 해수를 끓여서 생산했으며 대부분이 식용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합성염소, 플라스틱, 제지 및 기타 가공생산에 대부분 사용되며, 식용은 겨우 6%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에선 중국 산서성(山西省) 운성시(運城市) 해지(海池, Xiechi Lake)의 수면에서 BC 6천년경 소금을 수확했다. 이전 동유럽의 전(前)쿠쿠테니문화의 신석기시대(Neolithic people of the Precucuteni Culture) 유물에서 BC 6천 50년에 해수를 끓어서 소금을 생산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BC 2천 800년경 이집트에서 페니키아인과 레바논 백향목(cedar), 유리 및 보라색 염료(dye purple)를 소금과 교역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숙성김치(Matured Kimchi)는 신라갓김치에서

삼면이 바다로 싸여있는 한반도는 풍부한 소금생산으로 BC 6천년경 중국내륙보다도 더 일찍 소금을 생산이용했다.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 재위기간 300~331)은 평안남도 비류강(沸流江)을 중심으로 소금을 판매하면서 정보와 재정을 장악한 뒤 국왕이 되었고, 죽어서도 어머니 품과 같은 미천강변(美川江邊) 언덕에 잠들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한반도 해안지역에서는 내륙보다 먼저 새우젓, 명란젓 등의 염장식품, 겨울용 김장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기록상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683년에 된장, 김치, 술과 같은 발효식품을 만들어 예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사천지역에선 1천 500년 전부터 소금 혹은 식초 등으로 부추 절임 등의 절이기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중국문헌상에서도 한반도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대국가시대 달구벌은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강력한 국가세력은 형성하지 못했으나 세력 간의 균형추로 역할을 했기에 결과론적으로는 현실안주의 독배였지만 주변국가로부터 왕관을 받았고 왕족으로 대우를 받아왔다. 그래서 오늘날 다른 지역보다 왕관이 더 많이 출토되고 있다. 1923년 오늘날 동산병원 뒤 서문시장 터 천왕당지(天王堂池) 매립 시 제27호 고분 제1석실에서 높이 30.9cm 둘레 18cm의 정식금동왕관과 23cm 높이 18cm 둘레의 약식왕관이 발굴되었다. 자작나무가지와 잎을 디자인한 출자영락왕관(出字瓔珞王冠)이었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인 달구벌에 AD 261(沾解王15)년 2월에 달성(達伐城)을 축성해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사령관으로 대가야정벌(방어)전초기지로 삼았다. 토착귀족들의 음식대접과 가야 혹은 백제에서 귀순하는 인사를 위해 첨단초소였던 현풍(玄風)에다가 AD 505(智證王6)년 11월에 석빙고설치와 담당부서 빙고전(氷庫典)을 파견했다.

사실, 석빙고는 BC 100년 이전에 오늘날 이란 케르만(Kerman) 등지에 제빙과 저빙시설인 모아예디(moayedi)를 설치해서 이용하고 있었다. 신라비단장수들이 이것을 신라에 도입하여 AD 27년(弩禮王) 왕도(王都) 반월성(경주 인왕동 387의 1번지)에 화강암 반원형구조의 석빙고를 설치했다. AD 500년부터 514년까지 재위한 지증왕은 대가야평정전초기지 i) 현풍을 현청(縣廳)수준으로 승격, ii) 귀빈접대용 갓김치 등을 상시 비축할 현풍석빙고를 만들었고, iii) 빙고전 관리를 파견하여 운영관리를 했다. iii) 곧 바로 합천야로(陜川冶爐)로부터 밀수한 덩이쇠(鐵釘)로 첨단무기를 만드는 세칭 무기제조창(論武工廠)인 ‘논공(論工, Weapon Technology Complex)’을 비밀리 설치했다. 이에 진흥왕(재위 540~576)은 이곳에다가 삼량벌정(參良火停)이란 정예부대 병정 1만여 명을 배치했다.

1995년 지산동 옥산신라토기가마터(玉山新羅土器窯)에서 신라시대 달구벌사람들이 숙성갓김치를 만들어 먹었다는 고고학적인 유물로 6세기경 제작된 팽이형토기가 출토되었다. 팽이형토기는 다른 지역에선 땅에 묻어 각종 씨앗(종자)을 저장했지만, 달구벌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갓김치를 숙성시켜 발효음식문화를 창조했다. 이런 특이한 숙성김치는 7세기 이후 일본으로 신라김치라는 이름으로 보내졌다. 그런 역사적 기록은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의 고문서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즉 신라에서 수수보리 김치(須須保里)”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다. 또한 729년에서 749년까지 진공물목(進供物目) 목간에 ‘니라기(にらぎ)’혹은 ‘수수보리(すずほり)’라는 신라김치기록이 대량으로 나왔다. 금상첨화로 일본인 모도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가 저술한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에 수수보리는 ‘외국에서 온 저리기 음식(漬物)으로 조선에서 온 김치(朝鮮のキムチ)’라고 적혀 있다.

이외에도 1601년 경상감영을 안동에서 대구로 옮기면서 한양조정 다음의 권력가 집단지역 혹은 영남유림 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권력향유와 격에 맞는 품위음식인 김치를 석빙고에 저장했고, 귀빈에 한정해서 숙성김치를 도도하게 먹었다. 뿐만 아니라 ‘사자는 쥐를 사냥하지 않는다(A lion won’t hunt for mice)’는 밀림의 왕자 사자처럼 폼생폼사했던 경상감영귀족들은 품격에 맞는 음식문화를 위해 놋그릇(유기)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지난 2008년 개관한 방짜유기방물관이 보다 확실하게 그림의 빈틈을 채워주고 있다. 오늘날 과학으로 놋쇠(鍮器)는 구리(Cu)와 주석(Sn) 금속을 78:22의 비율로 합금해 만들기에 금속이온이 바이러스와 같은 각종세균을 죽이는 미량동효과(Oligo-dynamic Effect)를 낸다. 이렇게 살균함으로서 부패로 음식 맛이 변하는 걸 방지했고, 유산균 등의 유익한 발효균외의 잡균을 모두 막아주었다. 이런 과학적인 사실에 착안한 경상감영 음식문화의 품격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이를 실증하는 의미에서 방짜유기박물관이 2008년 5월 25일에 고전 회남자(淮南子)에서 ‘많은 신선들이 비법을 도야하는 명산’ 팔공산 기슭에 개관했다는 현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와 반해 일본은 소설 속의 주인공을 마치 실존인물처럼 가상의 생가와 유품까지 만들어, 세칭 ‘시체를 빌려 영혼을 불러들인다’는 공정(借尸還魂工程)을 해왔다. 하나 실오라기라도 황용과 봉황이 그려진 비단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이 다 알고 인정하는 것까지도 언제나 부정하고 있다. 특히 대구는 이런 고고학적인 유물이 있는데도 ‘김치의 본향 광주’라고 학자와 전문가까지도 주장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광주김치박물관이 있고, 세계김치축제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글·그림=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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