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주택인 우리 집 화단에 매화가 핀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가지마다 수액이 오르고 활짝 핀 꽃 속으로 떼로 날아들어 몸을 비벼대는 벌떼들을 보면 기적은 비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곤 한다. 다만 이런 기적적인 일들이 어찌 때와 장소를 알고 찾아오는지 신기할 뿐이다.
휴일 아침 창문을 열어젖히자 와락 매화향이 밀고 들어온다. 방충망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안방 가득 쌓인다. 딸내미 품 안에 잠자던 달이와 산이 그리고 몽이가 어찌 알아챈 건지 차례대로 뛰어나온다. 그리곤 창틀에 쪼그려 앉아 코를 킁킁 거리며 향기를 맛보고 입맛을 다신다. 비몽사몽 눈을 가늘게 뜨고 정신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딸내미가 묻는다.
"엄마. 달이와 산이 몽이가 자다 말고 뛰쳐나가던데 이게 무슨 일이고. 세상에나, 이건 또 무슨 향기지. 참 신기하네. 꽃향기를 맡고 저리 뛰어나간 거란 말이제. 근데 어찌 알았지?"
매화향이 집안 가득 향기를 채우는 동안 창밖에는 매화 반, 벌 반이다. 꽃이 벌인지 벌이 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자다 말고 달려 나온 달이와 산이 그리고 몽이는 이미 꽃향기에 취해 봄날 꽃밭에 앉은 취객처럼, 창틀에 앉아 꾸벅꾸벅 나머지 잠을 청하고 있다.
"오늘은 해쑥으로 애탕국을 끓여, 달래 무침을 곁들인 특별메뉴로 아침밥상을 한번 차려 볼까나"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딸내미가 반색하면서 애탕국을 어떻게 끓이는지 알려달라며 조른다.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겠다 싶어 한번 해보라고 맡겼더니 지혜 없고 지식뿐인 기계가 가르쳐 준 레시피를 검색해 본 딸내미가 겸연쩍게 묻는다.
"엄마 너무 어렵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온다."
딸내미의 물음에 살아생전 아버지가 내게 일러주시던 데로 레시피를 일러준다.
"먼저 쑥은 시든 잎과 검불을 떼어내고 바득바득 씻어 쑥물을 빼내야 해. 소금 푼 물에 살푼 데친 후 밑간한 다진 쇠고기에 데친 쑥을 썰어서 넣고 잘 어울리게 동글동글 완자를 빚어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 옷을 입혀주지. 그다음 멸치와 다시마 우린 육수에 넣고 소금 한 꼬집과 조선간장으로 간간하게 간을 맞추는 거야. 국물의 수위는 눈대중으로 알아서 하면 돼. 맛내기는 혀가 입안에서 느끼는 감정에 알맞게 담백하게 조절하는 거지. 입맛이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걸 잊지 말고 일단 심심하게 끓여야 해. 싱거우면 간을 좀 더 하면 되지만 짠 건 어찌할 도리가 없거든"
순간 딸내미의 눈빛이 흔들린다. '파는 몇 센티 길이로 잘라야 하는지, 듬성듬성 굵게 썰어야 하는지 아니면 잘게 채로 썰어야 하는지, 소금은 또 몇 그램을 더 넣어야 하는지. 물은 한 컵 반이면 될는지' 인터넷이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정보를 검색하는 것에 익숙하게 길든 딸내미로서는 아주난감한 일이라는 것을 모를 일 없었지만 난 계속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부분은 가족의 입맛에 맞추어 음식을 하지만 가끔, 나에게 상을 주고 싶은 날이나 살아생전 애탕국을 즐겨 드시던 아버지가 오늘처럼 그리워지는 날이면, 오로지 나만의 입맛에 맞출 때도 있지. 그러니 오늘은 너에게 전권을 줄께. 딸아 어렵지 않은 일이야."
딸내미는 부처의 말을 알아들었던 가섭처럼 알 듯 말 듯한 염화미소를 보인다. 그런 딸의 뒤에서 나는 다시 한마디 더 던졌다.
"중요한 건 언제나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지." 뜬금없는 마지막 말에 딸은 당황한 듯 보인다. 봄철 입맛이 떨어질 때면 '애탕국만 한 게 없다.'라시던 아버지가 생각나듯, 매화 향기가 보낸 봄의 신호를 알아듣고 창가로 달려 오르던 달이, 산이, 몽이처럼 떨어진 입맛을 찾아 나선 딸내미가 해쑥 같은 초록빛 봄날을 꿈꾸고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만의 애탕국을 보글보글 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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