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봄
잘 가, 봄
  • 승인 2021.04.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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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내 시야에서 구불구불 멀어지는 길이 볼펜심에서 흘러나오는 흘림체 같다는 것을 창가에서 길을 나서는 당신 자동차를 배웅하다가 알게 되었네, 세상사 이야기 나부랭이를 시로 읊으려는 나, 이른 새벽, 일렬의 가로등 불빛에서도 허공에서 떨어지는 달빛에서도 만나고 있었네// 커피 한잔이 선잠 깬 쓰린 위벽을 달래고 나면, 가장이라는 견장 어깨에 달고 도로 위로 찬찬히 접어드는 당신, 붉고 푸른 신호등은 내가 쓰는 이야기의 부적합과 적합의 간격이 되고 있었네// 잠의 허기가 불러오는 죽음도 쉼표를 잘 찍지 못한 불찰이라는 대목에서 깜빡 졸고만 나, 느닷없이 툭 튀어나온 말 같은, 고라니 한 마리 미처 피하지 못해 찍는 마침표가 되고 말았네// 못 갖춘 문장들이 수북이 쌓여갈 때 가장은 아내와 새끼를 위해 그래! 조금만 더 힘내서 쓰는 거야,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기듯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쪽잠을 청하는 거라네// 고단한 오늘은 내일로 이어져, 내가 쓰는 그의 도로 이야기는 언제쯤 탈고를 할까, 볼펜을 잡고 창가에 턱 괴고 있는 내시야 속으로 그의 귀가는 골목의 흘림체가 되고 있었네"

남편을 생각하며 쓴 '운전대를 볼펜처럼 잡고'라는 제목의 내 시를 필사적으로 필사해 본다. 달빛이 내려앉은 창밖, 매화나무 한 그루가 화단을 지키고 서 있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매실 뛰어내리는 발걸음 소리 타박타박, 들리는 사월 한 밤이다. 깊은 잠에든 그의 코 고는 소리가 팡파르처럼 따라 흐른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순 반가움보단 덜컥, 걱정이 앞선다. 전화기를 귀에 가까이 댄 채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

"숙아, 신랑이 하늘로 떠났어. 코로나 19 시국이라…."

그녀의 흐느낌이 가물거리며 어둠 속으로 흐트러진다. 천지가 초조히 방안을 서성거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의 말은 길을 잃고 헤맨다. 어떤 말도 소용이 없어진 채 사라진다. 말 이상 가는 침묵이 말이 죽어간 그 자리에 낮게 드리워진다.

"잠자고 있었는데 아침에 눈 떠 보니 이미 떠난 후였어! 인사도 없이…."

새벽 12시 30분, 안방에선 남편이 잠들기 전 맞춰놓은 알람 소리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비집고 나온다. 덜 깬 잠을 털어내며 그가 방문을 열고 따라 나오더니 욕실로 향한다. 수돗물 흐르는 소리, 양치하는 소리, 바지며 양말, 외투가 수런대는 소리를 듣고서야 울던 울음을 멈추고 나가 준비해 둔 음식들을 챙겨 그의 손에 쥐어준다. 그제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한 그가 놀라 묻는다.

"먼 일이고?"
"내 친구 알제. 남편이 하늘로 떠났대. 당신과 동갑인…."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방 한 켠 벽면에 걸어 둔 가족사진을 한동안 뚫어지게 보더니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문단속 잘 하고 자라'는 말만을 남겨 둔 채.
라일락 지고 이팝꽃 흐드러진 어두운 도시의 골목을 축 처진 등을 보이며 그가 저녁 강물 흐르듯 떠내려간다. 한 술 두 술 밥알을 뜨듯 한 칸 두 칸 계단을 꼭꼭 씹으며 흘러간다. 그의 출근길을 배웅하며 '오늘도 무사히'를 몇 번이고 가슴으로 외치며 서성거렸는지 모른다. 달빛 아래 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생각한다. 그를 배웅하며 늘 그렇듯 다하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을까를 되돌아본다. 가슴 속 숨겨둔 채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다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다. 오늘은 더더욱. 친구 남편의 평화로운 죽음을 접하며 하나의 유성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수백만 개 중의 하나로 광활한 하늘에 잠깐 섬광을 빛낸 후, 끝없는 밤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그 유성이….

돌아보니 사춘기 때만 방황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물 지나 서른 그리고 마흔 지나 쉰을 넘어 환갑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인생은 여전히 어렵고 서툴 기만 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우리네 인생도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한 듯 보인다. 그토록 절절한 삶의 순간들도 결국, 사라진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 애틋한 추억 속으로 묻혀가길 바랄 뿐,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란 어디에도 없다.
울먹이던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그가 떠난 골목길을 비추고 서 있던 가로등 불빛 아래로 쏟아지던 윤슬처럼 반짝인다.

"곁에 있을 때 서로 맘 편하게 해 주는 것만큼 좋은 건 없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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