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윤여정이라는 이름으로
[백정우의 줌인아웃]윤여정이라는 이름으로
  • 백정우
  • 승인 2021.04.2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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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의 데뷔작 '화녀'(1971) 스틸컷.
윤여정의 데뷔작 '화녀'(1971) 스틸컷.

 

“혜교는 중국시장, 지우는 일본시장으로 나가, 난 재래시장을 지키마.”

2009년 이재용 감독의 영화 ‘여배우들’에서 송혜교와 최지우의 해외시장 진출에 던진 윤여정의 유머이다. 남아서 재래시장을 지키겠다던 윤여정은 미나리 씨앗을 들고 아칸소로 날아가더니 제대로 사고를 쳤다. 93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 1971년 김기영 감독의 ‘화녀’로 영화계에 데뷔한지 50년 되는 해에 이룬 성과다.

수상 소감에서 윤여정은, 모두 다른 영화에서 다른 연기를 했는데 어떻게 경쟁하겠느냐며 우리 사회에서 사실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 윤여정이 특별히 언급했듯이 명배우 글렌 클로즈와 어떻게 경쟁하겠는가.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올리비아 콜맨은 또 어떻고.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경쟁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 멋진 수상소감이란 이런 것일 터다. 그는 운이 좀 더 좋아서 이 자리에 서있는 것 같다는 말로, 함께 후보에 오른 배우들의 노고에 헌사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을 데뷔시킨 김기영 감독을 언급하며 추모했듯이 윤여정은 1971년 ‘화녀’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다. ‘화녀’는 한국영화사상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하녀’를 10년 만에 김기영 감독 자신이 리메이크한 영화로, 윤여정은 시골에서 상경해 중산층 가정에 들어가 파멸하는 하녀 역을 맡았다. 이 영화로 그는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신인상을 거머쥐며 걸출한 신인의 탄생을 알렸다.

운은 대개의 경우 실력이 뒷받침 된다는 단서가 붙는다. 200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강타자 매니 라미네즈는 단 한 개의 안타가 모자라 타격왕을 놓쳤다. 이 시즌 동안 라미네즈는 384개의 삼진아웃을 당했다. 그 중 하나만 안타로 연결됐더라면(…) 운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윤여정은 다른 배우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치열하고 성실하게 걸어온 연기 인생은 이번 수상이 결코 운이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수상 소감에서 밝혔듯이 오랜 시간 동안 경력을 한 걸음 한 걸음 쌓아올린 결과였다. 그런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고, 영광된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자기 생을 정성껏 보여준 사람이 준비한 최고의 정성이 오스카 수상소감이었다는 얘기다.

수상식이 끝나기 무섭게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다. 윤여정의 수상에 대한 소회를 묻는 질문에, 요컨대 한국여배우의 위상이 높아졌고, 여배우 단독주연 작품이 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여배우들’에서 윤여정은 기억이 있는 한, 대사를 외울 수 있는 한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앞으로 많은 영화가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올 것이다. 단독주연 작품도 찍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녀 명자든, 집사 병식이든, 상류층 사모님 금옥이든, 죽여주는 여자 소영이든, 그리고 한국할머니 순자든, 어떤 역할을 맡든 윤여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윤여정의 이름으로, 당당하고 멋진 우리시대의 어른으로,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리라 믿는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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