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 개인전] 돈황 벽화 장엄한 위용 화폭에…불교미술 현대적 재해석
[서용 개인전] 돈황 벽화 장엄한 위용 화폭에…불교미술 현대적 재해석
  • 황인옥
  • 승인 2021.05.09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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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까지 윤선갤러리
실크로드 고도 中 석굴 신비 매료
현지서 7년간 벽화 그림에 몰두
현대인 공감 가능한 세계관 창조
도자·목각 등 다양한 장르 접목도
국내 동양벽화 분야 최고 권위자
서양 기법과 동일시한 주장 반박
종교색 갇히지 않고 교감에 중점
새 기법 탐색하며 불화 현대화 시도
 
서용 작 ‘돈황연가(부분)’
서용 작 ‘돈황연가(부분)’

 

중국 간쑤성에 위치한 돈황 인근의 명사산 동쪽 끝 절벽을 따라가다 보면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척박한 사막 위의 거대한 절벽 1,6km에 걸쳐 석굴들이 조성되어 있다. "진정 인간의 구조물이 맞을까?" 싶을 만큼, 절벽이라는 의외의 장소성과 끝없이 이어지는 석굴의 양에서 압도적이다. "저 수많은 석굴들을 조성한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석굴을 사람들은 돈황석굴 또는 막고굴이라고 부른다. 

불교미술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돈황석굴은 중국 전진시대의 낙준(樂俊)이라는 승려가 절벽 속 천불을 착시현상을 경험하고 홀린 듯 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해, 무려 1,000여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1,000여개의 석굴이 조성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석굴은 490여개에 이르며, 석굴 내부는 채색된 벽화와 중앙에 놓여진 조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서용이 돈황석굴에 이끌린 것은 "신의 안배였다"고 말한다. 1997년에 실크로드 여행길에서 돈황을 만났을 때 그는 "돈황석굴에서 알 수 없는 서기(瑞氣)를 느꼈다"면서 "돈황벽화는 내게 운명이자 인연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 한중이 수교되자마자 중국유학길에 올라 북경 중앙미술대학에서 판화과를 연수하고, 동 대학에서 벽화로 석사를 졸업했다. 벽화 전공과 돈황벽화와의 만남 중 어느 것이 먼저였든, 그 둘은 운명으로 엮여있었다.

돈황 석굴 내부에는 거대한 변상도와 각종 불교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벽면벽화와 각종 장속도안화로 장식한 천장벽화로 장식되어있다. 돈황 석굴은 인도 불교와 불교 미술이 중국으로 전해지고 첫 번째로 꽃을 피운 중국불교문화의 성지이며, 동서양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만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서용이 "돈황 벽화에는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구석진 곳의 작은 부분에도 현대미술에 견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돈황 벽화를 보는 순간, 그동안 고민해 온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은 듯했으며, 더 일찍 돈황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며 돈황 벽화와의 가슴 벅찼던 첫 순간을 떠올렸다.

돈황 벽화를 근간으로 불고미술의 현대적 재해석에 매진하는 서용 작가
돈황 벽화를 근간으로 불교미술의 현대적 재해석에 매진하는 서용 작가

 

돈황벽화에 매료됐던 당시,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유학생 신분이었던 94년에 중앙미술대학 화랑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을 솔드 아웃시키며 한껏 고무된 상황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96년에 중국 최고의 미술관이라는 중국 미술관에서 개최한 두 번째 개인전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에 상심에 젖어 있었다.

작업에 대한 불만은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해야 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그때 실크로드 여행길에 올라 돈황을 만났다. 당시 돈황 벽화는 그에게 신선한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돈황 벽화에 이끌리기 이전에 그는 추상성이 강한 작업세계를 추구했는데, 벽면을 가득채운 돈황 벽화에서 고대 화공들의 작가정신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그의 작업이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점이었다.

그는 "돈황 석굴을 보고 이게 진정한 예술이고 작가의 자세인데, 나는 그동안 어디서 헤매고 다녔는지 부끄러웠고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돈황 벽화의 숭고함에 뼛속까지 전율이 느껴졌고, 벽화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돈황에 남게 됐다." 

돈황에 남으면서 벽화를 그대로 옮겨 그리는 임모(臨摸)를 시작했다. 임모를 통해 1,600년 전의 화공들과 물리적인 시간을 뛰어넘어 교감하며, 그들의 예술혼에 다가갔다. 돈황 벽화는 내재된 욕망들을 걷어내고 새로운 가치로 이끄는, 그에게는 최고의 스승이자 자상한 선배였다. 

그는 "돈황 벽화는 내게 용필법과 착색법을 알려주었다. 아주 자상하게 '먹선은 이렇게 긋고, 색은 이렇게 칠하고, 선염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현대 예술에 비정상적으로 양육되어 나 자신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돈황 벽화가 바로 잡아 주는 것 같았다."

돈황 벽화를 근간으로 불교미술의 현대적 재해석에 매진하는 서용 작가

그에게 돈황은 예술적 스승이자 영혼의 오아시스였다. 척박하지만 남성적인 기운이 강한 돈황의 기운은 길 잃은 그의 영혼에 한 줄기 빛이었다. 6개월 예정이었던 돈황 일정이 7년으로까지 이어질 만큼, 돈황의 사막은 그에게 강렬한 이끌림이었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돈황의 지평선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우주의 기운을 모아 가로 그어 놓은 일필의 먹선을 대한 듯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비움의 미학을 경험했다"고 했다.

고국 음식이 그리워 청양고추와 알타리무, 상추종자를 서울에서 공수해 직접 농사를 지으며 돈황의 모래 바람과 맞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동안 적지 않은 수의 돈황 벽화가 그의 손에 의해 옮겨졌다. 그러면서 그는 돈황 사람이 다 되어갔다. 이 시기에 그는 중국 난주대학 역사학과에서 세계 최초로 개설한 돈황학 박사과정을 외국인 최초로 입학하고 졸업까지 하게 된다. "나는 돈황의 기운에 매료됐고, 돈황 벽화의 예술적 경지를 사랑했다."

서용 작 '천상언어'
서용 작 '천상언어'

 

그는 국내 벽화 분야의 권위자다. 고구려 벽화를 포함한 동양의 벽화를 서양의 프레스코 벽화기법과 동일시 하는 학계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동양벽화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최초로 바로잡았다. 프레스코(fresco) 벽화는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마르기 전에 안료를 석회물로만 개서 그리는 이른바 습식 벽화인데 반해, 동양의 벽화는 회와 모래를 섞기도 하지만 진흙을 주성분으로 벽을 바르고 완전히 마른 후에 안료와 접착제를 섞어 그리는 건식벽화가 대부분이다. 동양 벽화가 건식벽화라고 주장한 인물이 바로 그다.   

중국, 그것도 돈황 사막에서 외국인이 홀로 기거하며 벽화를 연구한다는 사실은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언론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만큼 큰 관심을 받았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해서도 그는 일약 관심 작가로 떠올랐다. 가나아트센터 기획으로 서울옥션 경매장에서 귀국전을 열었을 때 한국인이 돈황벽화를 그려왔다는 것이 특이점으로 회자됐다. 무엇보다 대형 전시장을 가득 메운 작품의 규모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미술계와 언론이 돈황 벽화를 그린 내 작업세계에 대해 대대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돈황 벽화 연구는 서용 예술의 출발점이지만, 그는 그것에 머물지 않고 한 보폭 더 나갔다. 돈황 벽화를 기초로 불교미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발전시킨 것. 세상은 그런 그를 불교미술 현대화의 선구자로 꼽는다. 그가 단순히 옛 것을 본받는 법고(法古)에만 머물렀다면 얻지 못할 평가다. 그러나 그는 옛것을 근간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신(創新)에 무게 중심을 옮겼다. "귀국해 돈황 벽화 재해석에 매진했다. 돈황 벽화의 재창작이었다."

그 옛날 경주의 석공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불교미술을 석굴암 본존불의 아름다움으로 최고의 경지를 만들었듯이, 서용도 돈황 벽화를 기초로 현대인과 공감하는 새로운 불교 미술의 정수를 이끌어 내고 싶어했다.

그의 화두는 "불교미술을 어떻게 현대적인 미감으로 재해석하고 창작 할 것이냐 하는 것"이고, "불교적인 도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 어떻게 현대미술로 자리 매김하고, 세계인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가"하는 것에 있다. 그는 "국적을 뛰어넘어 많은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세계를 창조"한다는 기치 아래 다양한 기법을 시도한다. 변상도나 보살도의 형상을 해체하거나 반복 하는 등의 시도를 통해 전통불교미술과의 '다름'을 추구하고, 도자나 목각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켜 자신만의 '서용표' 작업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는 21세기의 동시대인들의 정서와 소통하기 위한 불화의 현대적 재해석에 낙관론을 펼쳤다. "현대적 불교미술이 현대 미술의 중심인 뉴욕의 현대 미술관에 걸리는 상상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고, 나는 상상의 힘을 믿는다."

서용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인간의 영역으로 인정하지만, 예술은 신의 영역"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믿음은 불교라는 종교 예술을 추구하는 작가로서 '보이지 않는 힘의 관여'의 인정하는 태도로 연결된다. 이런 측면에서 자신을 '신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를 연결하는 매신저'로 인식한다. 이는 그의 작품명이 '천상언어(天上言語)'인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작업은 신과 교감하는 일이고, 그런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전하는 전령사들이다."

그의 예술은 종교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불교미술을 추구하지만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종교에 갇히는 것이다. 그의 불교적인 형상들은 도상일 뿐, 전체에 대한 이미지는 현대미술이다. 그는 "그림에는 '무엇을' '어떻게' '왜' 이렇게 삼대 요소가 존재하는데, 이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왜'가 아닌 '무엇을' '어떻게'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 가 조형을 형성하는 요소이고 회화의 근간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숭고한 부처님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 놓았는데, 그림이 안 좋으면 아무도 그 말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 그림은 폐기 될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언급했다. "화가는 결국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좋은 그림을 그릴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들은 신의 얘기를 즐겁게 감상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서용작가가 들었던 천상의 이야기는 수성아트스퀘어 1층 윤선갤러리(아트플렉스)에서 30일까지 만날 수 있으며, 이번전시에는 최근작품부터 특별히 돈황에서 거주하며 그렸던 돈황벽화 모사작품까지 다양하게 소개되는 자리여서 더욱 큰 의의로 다가온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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