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식사도구부터 조선 구한 열쇠까지…‘젓가락 역사학’
단순 식사도구부터 조선 구한 열쇠까지…‘젓가락 역사학’
  • 김종현
  • 승인 2021.05.2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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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17) 밥상에 올라온 젓가락
명나라 파병 이끌다
임진왜란때 도움 청하고자
류성룡·이항복 명나라 방문
파병 반대하던 이여송 앞에
명품 젓가락 ‘소상반죽’ 꺼내
감탄한 이여송 참전 결심
소상반죽젓가락
류성룡이 예상했다는 듯 도포 품에 지니고 있다가 꺼낸 소상반죽.

젓가락이 식사도구로 사용된 시기로는 중국은 한(漢, BC 202~ AD 220)나라 이후로 보고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숟가락과 같이 출토되는 것으로 봐서 거의 같은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고고학적 유물로 발견된 것은 1971년 7월 5일 공주시 송산리 제6호 고분 즉 백제 제25대 무령왕(AD 462~523) 왕릉 발굴 당시다. 이때 108종 3천여 점 가운데 청동제 젓가락 2벌이 발견되었다. 그 젓가락의 특징은 i) 지름이 각진 모양을 하고 있으며, ii) 손잡이 끝부분엔 끈으로 묶을 수 있는 둥근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iii) 2벌의 젓가락이 놓여 진 위치는 무령왕과 왕비의 관대 옆이다. 이를 감안하면 나무젓가락은 중국과 유사한 시기 기원전 혹은 AD 200년으로 볼 수 있다. 청동젓가락도 AD 500년 이전에 이미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젓가락 유물이 발견되었으나 대부분 신분상 중인으로 추정되었다.

오늘날 젓가락을 식사도구로 사용하는 나라는 중국, 한국, 일본의 동양 삼국(東洋三國)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네팔, 말레이시아, 미얀마, 싱가포르. 태국 등에서도 국수를 먹을 때에 사용하고, 하와이, 남미서해 해안지역과 세계 각처의 아시안 이민사회에서 사용하기에 지구촌 전체에 널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젓가락에 담긴 우리나라의 아픈 사연을 살펴보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조선지원병 파병을 반대하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은 용의 간 요리와 대나무에 눈물자국이 있는 중국 광서성(廣西省) 동정호(洞庭湖) 남쪽 소수(瀟水)와 상수(湘水) 주변에 있다는 소상반죽(瀟湘斑竹) 젓가락을 원했다. 즉 류성룡(柳成龍)과 이항복(李恒福)이 이여송(李如松)을 만나 같이 밥을 먹는데, 갑자기 이여송이 “소상반죽 젓가락이 아니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달나라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선녀의 눈물자국을 아로새겨 있는 대나무이기에 당시 조선에선 구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이 난처한 상황에서 류성룡이 예상했다는 듯 도포 품에 지니고 있던 소상반죽을 꺼내놓자, 이여송은 ‘조선에도 인물이 있구나!’하고 참전을 결심했다는 설화가 청구야담(靑邱野談), 계서야담(溪西野談) 및 임진록(壬辰錄)에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젓가락 행진곡, 젓가락 장단(일명, 니나노장단)을 유행시켰던 일제식민지의 민생과 1970년대 경제부흥의 신화가 녹아내린 젓가락 스토리를 우리는 가슴에 안고 있다.

우리의 선인들은 전쟁이나 생사의 문제를 고민할 때 사당이나 문묘에서 갑론을박을 한 뒤에 주역(周易)에 의한 복술(卜術)로 결정한다. 이때 64(26)개의 대나무가지(算竹) 중 한 개의 젓가락에 의해 중대 사안이 결정된다. 한역(漢易)은 256(28)의 케이스로 대폭 늘었으나 사회적 다양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오늘날 일본 교토(京都)의 신사(神社), 신궁(神宮) 등에서 가미구찌(神口, かみくち)로 점치는 것 같이 산가지(籌條)를 뽑아서 번호(8괘)를 선택한다. 선택된 괘사(卦辭)에 따라 운세풀이와 미래예측을 한다. 젓가락은 두 짝은 음양(陰陽)을 상징하며, 3번을 반복해, 건(乾), 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이란 8괘(八卦, 23)를 만들었다.

주역(周易)은 괘(卦)를 중복해 64(82 혹은 25)개의 괘상(卦象)으로 각종상황의 변화를 예측했다. 그러나 좀 더 복잡해진 세상을 124(26)개의 괘상으로 예측하고자 했던 한역(漢易)은 주역보다 더 세분화 되었다. 젓가락 전략은 64개 괘상(cases)으로 늘어놓고 각종 리스크(risk)와 재앙(disasters)을 예측하고, 상황별 대책시나리오를 강구(自强不息)해 미래(운명)까지 만들어(개척)가자는 아이디어였다. 오늘날 용어로는 시나리오별 대응전략(by-scenario response strategy)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젓가락이 가장 많이 발굴된 충청북도는 ‘젓가락 페스티벌(chopstick festival)’을 구상하고 국제학회를 개최하는 등 준비를 하고 있다. 충북에 64개소 젓가락 발굴지역 가운데 청주시가 25개소, 충주시가 11개로 많이 출토되었다. 이곳은 삼국시대 철기생산을 주도했고, 고려시대 이후 화려한 금속공예가 왕성했던 지역이었다. 총 166점의 젓가락 가운데 조선시대의 유물이 133점이고 청동젓가락이다. 젓가락은 음식뿐만 아니라, 음악, 무술, 장례, 공예 등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금동왕관 및 귀걸이 등의 섬세한 공예는 젓가락을 사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황우석(黃禹錫, 1952년생)이 줄기세포 환자맞춤치료를 사이언스(Science)지에 게재하자 국내언론에서는 ‘젓가락 신화(myth of chopsticks)’라고 했다.

 

공예 발전 기여
과거 철기생산 주도한 충북
고려시대 이후 금속공예 왕성
젓가락 관련 유물 곳곳서 발굴
금동왕관·귀걸이 제작 등
섬세한 작업에 주로 쓰여

◇ 오곡백과가 풍성했던 한반도

한반도는 i) 지구의 위도 상에서 사계절(四季節, four seasons)이 뚜렷한 북반구에, ii)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해안 반도로서, iii) 지구촌의 인류가 아프리카동부에서 시작해서 4만 년 전에 최종낙원을 찾아온 한반도이기에 홍수아이들이 터전을 잡고 살았다. iv) 한반도에서 벼농사는 5천년 전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피(稷), 조(粟) 등의 재배는 1만 5천년 전부터 소급하고 있다. v) 유라시아 어느 지역보다도 풍요로운 먹거리로 인해 신석기시대에 접어들어서 불을 사용하여 맹수로부터 방어, 추위로부터 체온유지와 쉼터 보온(온돌방), 먹거리 굽기, 건조(훈제), 발효 및 가열처리를 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발효음식(술, 된장, 김치, 식초 등)을 가장 먼저 만들어 먹었다.

중국 고전을 종합하면, BC 2,700년 이전에 생존했다는 동이족(東夷族) 신농씨(神農氏, 생몰미상)는 i) 백성들에게 농경작물재배를 가르쳤으며, ii) 쟁기, 서래 등의 농기구를 개량해서 농업생산을 증가시켰으며, iii) 자기 몸으로 실험해 독성계측과 독초를 맛보면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았고, iv) 보다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식치(食治)와 약초를 정리해서 본초경(本草經)을 저술했다. 이를 통해 이곳 한반도는 “연연세세 풍년이 들었고 오곡이 풍성하게 잘 여물었다(五穀豊穰, ごこくほうじょう)”고 노래했다. 여기서 오곡(五穀)이란 인도에선 보리, 밀, 쌀, 콩, 깨를, 중국에선 참깨, 보리, 피, 수수, 콩을, 일본에서는 쌀, 보리, 조, 콩, 기장 등이었다. 사실 시대에 따라서 다소 다르게 변경되었다.

우리나라의 피(稷) 경작에 대한 고고학적 사실은 함경북도 회령읍 오동리의 ‘화석으로 된 피(炭化稗)’가 출토되었고, 고려사 병지(高麗史, 兵誌)에선 병마용 사료(兵馬飼)와 빈민의 식량(貧民糧)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속담에 “피죽도 못 먹었냐?”라는 말이 있듯이 민족의 구황비상식량으로 경작했다. 피의 원산지는 한반도와 아시아다. BC 8,000~3,000년 이전 선사시대의 대표적 농경작물이 피(稗)였으며, 이후에 고급먹거리로 벼(쌀)가 경작되었다. 중국의 주(周)나라는 피(稷)를 조상신으로 모셨으며, 사직(社稷)이란 국가종묘가 사직에 좌우되었다는 의미였다. 농사를 담당했던 관직으로 후직(后稷)을 두었다. 당시 백성들의 먹거리를 산출하는 후직을 찬양하는 시경(詩經, 民勞)의 ‘백성들 또한 고달프니(民亦勞止)’라는 시가에서는 천지가 감응하여 국가시조(國家始祖)를 탄생시켰다고, 즉 농업신인 후직(后稷)을 찬송했다. 우리 민족은 조당수로 명줄을 이어왔다.

중국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곡식(貴粟)은 바로 조(粟, millet)였다. 고고생물학(考古生物學)에서는 조가 인간의 식량으로 사용된 것은 7,000년 전으로 보고 있으며, 10,000년 전까지 소급할 수 있다. 한반도 무문토기시대(Korean Mumun societies)에 피 경작을 시작했으며, 중국은 이후 신석기시대 중국남부지역에서 재배된 것으로 세계가 공인하고 있다. 조(粟)는 BC 6,500년 전 중국 허난성(河南省) 페이리강 문화(Peiligang culture)와 허베이성(河北省) 츠산문화(磁山文化, Cishan culture)에서 탄화속(炭化粟)이 발견되었다. BC 5,000년 경 당시 백성들이 조를 주식(主食)으로 먹었던 기록으로 하남성(河南省) 양사오문화(仰韶文化)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BC 3,300년 경 부산 동산동(釜山 東山洞) 패총에서 탄화속(炭化粟)을 발굴했다. 이어 일본은 BC 2,000년 경 홋카이도(北海島) 우스리지(臼尻)에서 재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유럽에서 BC 2,000년 경으로 추적되는 탄화된 씨앗(carbonized seeds)들이 발굴되었다. 조는 생육여건상 생육기간이 짧고 건조기후에도 강해 척박한 화전(火田)에도, 흉년의 이모후작(二毛後作)으로도 선호하는 작물이다. 특히 가뭄에 구황식량(救荒食糧)으로 가장 많이 심었던 곡식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춘궁기(春窮期)에는 ‘좁쌀로 멀건 죽(조당수)’을 마시면서 생명을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i) 절량(絶糧)으로 봄철 산나물만으로 먹다가 산채독이 온몸에 펴지거나, ii) 삼순구식(三旬九食)도 못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찾아오는 부종(浮腫)에, iii) 곽란, 소갈(消渴), 복통 등에도, iv) 심지어 비혈(鼻血), 견문상(犬吻傷) 등의 민간요법으로 좁쌀(조당수)을 사용했다. 노란빛깔의 멀건 조당수(粟糖水)는 보릿고개(麥嶺)를 넘는 한반도의 백성들에겐 ‘황금의 생명수(Aureum aquae vitae)’였다. 1980년대까지 차조(glutinous millet)는 폐병환자에게 치유식(healing food)으로 권장되었다.

글·그림=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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