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성 얻은 이탈리아 대리석 조각…고수영, 서울 경인미술관 전시
야생성 얻은 이탈리아 대리석 조각…고수영, 서울 경인미술관 전시
  • 황인옥
  • 승인 2021.06.0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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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방한 분위기의 ‘향기’ 연작
호랑이·자동차·여인 등 다루며
여성적인 선·매끈한 표면 강조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에서는
윤곽 뚜렷해지고 터치감 살려
추상적인 분위기 완전히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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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영 작 ‘향기’

고수영작-향기연작
고수영 작 ‘향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며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과제이지만 쉽지는 않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취성으로 쉼 없는 작업을 지속할 경우만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어느 한 세계에 갇히는 경우 앞으로 나아갈 수 없 다.

조각가 고수영은 꽤 긴 시간 혼자만의 사투를 벌여왔다. 링이나 원반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표현한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내재된 다양한 소리들, 인체를 역동적으로 표현한 다이너미즘, 허공에 피어오르는 연기 작업 등을 발표했다. 모두 꿈틀대는 내적 기운을 표현한 추상조각들이었다.

영남대학교 조소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탈리아 로마국립미술아카데미 조각과를 졸업하며 조각이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오는 동안 조각을 향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조각에 대한 고뇌가 너무 깊은 나머지 언제나 혼자만의 작업으로 외롭게 싸워야 했다. 추상조각 작업이 길어질수록 정작 동료 작가들의 호평을 이끌었지만, 세상과는 소통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는 당시를 “과거 작업은 나 혼자만의 만족으로 끝났었다. 작품이 너무 어려워 설명하는 나도 어려웠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대중도 많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때 그에게는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절박했고,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이라도 혼자만의 즐거움에 그치면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게 되면서 희미하게 무언가 잡혀지는 것이 있었다. ‘소통’의 중요성을 자각한 것. 그러면서 작업에 변화가 깃들기 시작했다. ‘향기’ 연작의 시도였다.

“고뇌의 시간이 깊었으니 이제는 고뇌를 털어내고 나도 조금은 편한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편해야 대중들도 편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세상과의 소통’에 방점을 찍자 추상 일색이던 작업세계에 변화가 시작됐다. 그의 손끝에서 해학적이면서 호방함이 넘치는 조각들이 줄줄이 탄생했다. 호랑이, 고양이, 자동차, 여인 등 조각에 구체적인 대상이 등장하고, 그 형태들 역시 진지함 대신 친근함으로 대체됐다. 여인의 머리나 동물들의 등에 한아름 장미를 장식하며 친근함의 결은 한층 짙어졌다.

장식에 해당하는 ‘장미’는 단순히 시각적인 재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장미’는 그가 조각한 대상의 내적 향기에 해당됐다. “태어날 때 수수한 본성으로 태어났지만 살아가면서 변질되고 왜곡된다. 나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인간 내면의 순수한 본성을 다시 우리 가슴속에 피워내고 싶었다. 그 방향성이 장미를 통해 표현되었다.”

‘순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누구라도 순수 앞에 서면 순해진다. 순수의 힘은 그만큼 강렬하다. 그는 ‘향기’ 연작에서 ‘순수’를 지향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목적은 달성됐다. 사람들이 장미로 장식한 해학적인 여인이나 동물 조각들에게 먼저 한 걸음 다가와 “재미있다”며 말을 걸어왔다. “대중과 소통하면서 저 역시 많이 밝아지고, 제가 밝아지니 작가로서 좋은 일들도 계속 내 주위를 맴돌았다. 소통의 힘은 그만큼 컸다.”

조각의 재료는 이탈리아 대리석.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조각 작품들의 재료였던 바로 그 대리석이다. 우유 빛깔처럼 희디 흰 표면이 이탈리아 대리석의 특징인데, 작가는 하얀 대리석의 차가운 물성을 직접 기계로 자르고, 손으로 깎고, 손 사포로 문지르며 돌 속에 숨겨져 있던 여인이나 동물 형상들을 해학적으로 드러낸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걸출한 예술가들이 썼던 돌이지만 감수성이 전혀 다른 조각들을 토해낸다.

“이탈리아와 한국의 문화적 감수성은 다르다. 나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서 나의 감성에 맞는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난 7일 개막한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 전시에 신작들을 내놓았다. ‘향기’ 연작 신작들이다. 터치 자국을 남기거나 면의 느낌을 살리는 등 매끈하게 처리했던 표면에 변화가 시도되고, 여인의 인체 선도 훨씬 유려해졌다. 또한 얼굴도 눈과 코 입 등의 윤곽도 보다 뚜렷해지고, 아이같은 순수나 여성적인 선에 남성적인 강인함도 추가됐다.

“조형적으로 단조로웠던 부분들을 테크닉적으로 꾸몄는데, 좀 더 남성적인 기운의 표현이었다. 내 내면에 있는 야생성이 본능적으로 들어간 것 같다.”

이번 신작에서 비로소 추상 작업의 흔적을 완전히 걷어냈다. ‘향기’ 구작의 선들에 ‘연기’ 연작에 표현됐던 선들이 남아 과도기적 면모가 없지 않았다. 인체의 선이 왜곡되거나 일반적으로 보았던 인체선의 모습에서 살짝 비껴나 있었다. 하지만 신작에서 완전한 새로운 선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단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작업세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편안한 작품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완전히 새로운 작업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며 작업의 연결성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했다. “작업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런 이유있는 변화들을 거치면서 작업이 진화해간다. 나는 계속해서 진화해가는 작가로 살고 싶다.” 전시는 6일까지 경인미술관에서.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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