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영화보다 덜 무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
[백정우의 줌인아웃] 영화보다 덜 무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
  • 백정우
  • 승인 2021.06.1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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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그것두번째이야기
영화 ‘그것: 두 번째 이야기’ 스틸컷.

어린 시절, 교회에 열심이었던 나는 집으로 오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날 때 마다, 찬송가를 부르면 마귀가 달아날 거라는 어느 권사님의 확신에 찬 조언에 따라 찬송가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찰스 로튼의 영화 ‘사냥꾼의 밤’을 보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영화에서 두 아이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사이비 목사 로버트 미첨이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를 부르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젠장, 나는 귀신이 쫓아올까봐 무서워 불러댄 찬송가를 악마가 흥얼대다니. 그런데 이 영화가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던 건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것이 아닌, 집요한 추적자가 불러일으키는 불안감 그 자체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감시하고 추적하며 압박해오는 타인 또는 집단은 어떤 시각적 공포보다 더한 두려움이다. 예리한 도구에 목이 잘려나가는 공포보다 피를 마르게 하는 심리적 공포를 더 높이 쳐주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공포영화 마니아 이야기 하나. 영화판에서 알게 돼 어찌어찌 내 제자가 된 이 친구, 밥은 굶어도 공포영화는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찾아보는 진정한 고수인데, 웬만한 장면에서는 눈도 꿈쩍하지 않을 뿐더러 “저 걸 공포영화라고 만들었냐”고 코웃음을 치기 일쑤인 녀석이다. 피칠갑도 모자라 사지 절단에 필름대신 창자를 감아서 돌리는 장면이 나와야 흡족해 할 정도이니 여간 중증이 아닌 게 분명하다. 심지어 멜로영화가 최고의 공포영화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 사내. 오죽하면 녀석이 만나는 여자 친구의 유효기간이 (공포영화 시즌이 도래하는)여름을 넘기는 법이 없을 정도다. 이쯤 되면 문제 있는 인간이 아니냐고? 천만에 말씀. 정신상태가 멀쩡할 뿐더러 예의바르고 능력 있으며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사는 청년이다.

그런 오해를 받을 때 마다 던지는 이 친구의 항변이 제법 일리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공포 그 자체인데, 영화가 무서워봐야 치열한 삶의 현장만큼이야 하겠느냐”는 것. 백번 맞는 말이다. 사실이지 공포영화만큼 동시대의 억압되고 일그러진 사회상을 충실히 반영한 장르도 드물다. 조지 로메로의 걸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로만 폴란스키의 ‘로즈마리 베이비’가 미국이 정치사회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절인 1968년에 탄생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공포영화는 당대 사회상의 반영이다. 계급과 인종과 종교와 성적 편견에 대한 날카로운 텍스트이다. 달리 말하면 소외집단과 하류문화에 대한 지배문화의 인식전환을 촉구하는 경고장이 공포영화인 것이다.

작금의 뉴스를 보면 대체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의심이 든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내 오장육부의 소유권마저 타인의 손에 넘어갈 정도로 혼탁하고 무서운 세상이다. SNS 단상만으로 정치적 성향이 결정되어 곤혹스러운 경우를 당하는 소식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2021년 한국사회는 탐욕에 사로잡힌 일그러진 모습이자 숨겨진 공포 그 자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어떤 공포영화인들 무서울 것인가.

호러시즌의 돌아오면 무시로 “요즘 공포영화는 전혀 무섭지 않다”던 녀석이 생각나고, 공포영화보다 더 잔인한 현실에 몸서리를 친다. 진심으로 나는 공포영화가 무섭게 느껴지는 현실, 최소한 영화보다는 덜 무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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